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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독일 통일⑥…오데르-나이세 선 국경 확정, 독일 NATO 잔류 타결
독일 통일에 영·프·소 반대, 미국만 강력 지지
2021. 05. 24 by 김현민 기자

 

독일 통일에 가장 반대한 사람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였다. 대처 총리는 외국 지도자를 만날 때마다 핸드백에서 2차 대전 직전의 1937년 독일 지도를 꺼내 들고 독일인의 기질, 국력, 지정학적 위치 등을 설명하며 독일 위협론을 역설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인 19899월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 영국은 물론 서유럽에서 독일의 통일을 원하는 나라가 어디에도 없다면서 소련이 독일의 통일을 막아줄 것을 역설했다. 대처는 동독의 민주화는 지지하지만 통일은 반대한다고 분명히 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대처 총리의 독일 통일 반대론은 더 심해졌다. 198912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EU 지도자회의에서 대처는 우리는 두 번이나 독일을 제압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돌아 왔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가망성이 전혀 보이지 않던 1985년에 대처는 독일의 문제는 독일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그녀가 몇 년후 게르만족 통합이 가시화되자 말을 바꾸었다. 대처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독일 통일이 너무 성급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대처는 더 이상 통일을 저지할수 없게 되자, 통일 연기론을 펼쳤다. 그는 양독일이 5년의 과도기를 두고 별도 국가로 존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래도 독일 재결합이 빨라지자 대처는 프랑스 대사를 불러, “프랑스와 대영제국이 독일의 위협에 공동대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대처는 프랑스도 믿지 못했다. 프랑스는 겉으론 독일 통일을 반대하면서 내심 서독을 끌어들여 EU 통합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있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장벽 붕괴 한달전까지만 해도 독일 통일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며 안이하게 판단했다. 그러다가 양독 경계선이 무너지자 미테랑은 나치의 부활을 우려하며 나쁜 독일인이 등장해 과거의 영토를 주장할수도 있다며 대처 총리에 보조를 맞추는 듯 했다. 하지만 미테랑은 대처보다 강경하지 않았고, 독일 통일이 불가피하다면 유럽 단일통화의 이득이라도 챙기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미테랑은 대처가 떠들수록 프랑스의 이익이 커진다고 판단했다.

 

2차 대전 후 독일 분할 /위키피디아
2차 대전 후 독일 분할 /위키피디아

 

소련은 2차 대전에서 독일에 의해 무려 2,000여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원한이 있는데다 위성국 동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통일을 저지할수 있는 나라였다. 고르바초프는 동독의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통일로 발전하는 것은 차단하려 했다. 독일의 결합이 불가피할 경우, 통일 국가를 중립국화한다는 것이 고르바초프의 복안이었다.

이탈리아 총리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명대사를 날렸다. 그는 나는 독일을 사랑한다, 그러나 독일이 두 개여서 더욱 사랑한다며 범게르만주의의 도래를 우려했다. 2차 대전에서 유대인 박해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독일 통일을 반대했고, 이웃나라인 네덜란드도 반대 기조에 합류했다.

독일 통일을 가장 공포스럽게 바라본 나라는 폴란드였다. 폴란드의 서부와 북부 지역은 2차 대전 이전에 독일 영토였는데, 포츠담 회담에서 폴란드에게 할양되었다. 서독이든 동독이든 폴란드에게 넘어간 영토할양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당사국이 제외된채 승전국이 일방적으로 채택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독일은 그 임시경계선에 승복하지 않았다.

 

헬무트 콜 총리 /위키피디아
헬무트 콜 총리 /위키피디아

 

유럽 열강이 일제히 독일 통일을 반대하는 가운데 유독 독일 통일을 지지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76월 베를린 브렌덴부르크 문에서 행한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를 향해 베를린 장벽의 해체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어 조지 부시(아버지) 대통령도 독일의 통일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후에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에 국무장관을 역임한 콘돌리사 라이스(Condoleezza Rice)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독일은 오랜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고, 미국의 우방이며, NATO 회원국이었다. 1945년의 이슈에 함몰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독일이 어떤 과정으로, 어떤 환경에서 통일하는지 여부가 중요했다. 우리는 독일의 재기엔 관심이 없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통일 독일이 NATO에 잔류하는지 여부였다. 독일의 사민당은 고르바초프의 눈치를 보느라 통일후 NATO 탈퇴를 주장했고, 독일 여론조사에서도 NATO 잔류를 지지하는 비율이 20% 이하에 머물렀다.

이런 분위기에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명석한 판단을 했다. 독일이 NATO를 탈퇴하면 NATO가 와해되고, 미국과 캐나다가 유럽 방위를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국과 프랑스가 반독일 연합전선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고 콜 총리는 판단했다. 그는 국내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NATO 잔류를 약속함으로써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냈다.

미국이 독일 통일을 강력하게 지지하자, 대처 총리도 하는수 없이 지지로 돌아섰고, 프랑스 미테랑도 재빨리 독일을 끌어 안았다.

서독은 소련을 어떻게 설득하는지를 궁리했다. 콜 총리는 소련의 경제사정이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해 1,000억 마르크의 지원금을 주는 것을 검토했다. 소련은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실제 독일이 소련에 통일사례금 조로 지원한 돈은 550억 마르크였는데, 당시 서독 GDP로는 8일분에 해당했다.

고르바초프는 예상보다 빨리 독일문제에서 발을 뺐다. 그는 1990년초에 독일의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하기에 달렸다며 한발 물러서더니, 그해 5월 조지 부시를 만나 독일의 NATO 잔류를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독일의 통일을 저해하는 이해당사국의 장애요소는 대부분 해소되었다.

 

오데르-나이세 선 /위키피디아
오데르-나이세 선 /위키피디아

 

독일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인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2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NATO-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회의에서 두 독일은 통독 협상에 옛 연합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독일이 과거의 영토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 조건에 반대했다. 하지만 더 이상 독일은 과거의 패전국이 아니었다. 미국이 통일을 지지했기 때문에 양독은 당사자로 협상에 참여했다.

독일 통일에 대한 국제회담은 19903월부터 10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양독일은 별도로 폴란드와 국경회담을 개최했다.

통일 당사국인 서독과 동독, 2차 대전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대표가 참가한 회의는 ‘2+4 회담이라고 불렀다. 이 회담에서 가장 큰 이슈는 18458월 포츠담 회의에서 결정된 오데르-나이세 선(OderNeisse line)의 국경 확정이었다. 이 국경 밖의 땅은 대부분 폴란드 영토로 넘어갔고, 동프로이센 북부는 소련 영토(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전전 구독일 영토의 20%에 해당하는 이 영토는 양독 어느 정부도 인정치 않았는데, 통일을 앞두고 이 영토를 고집할수 없었다. 이 땅을 주장할 경우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2차 대전으로 확전된 과거를 떠올리므로, 독일은 대()를 위해 소()를 버려야 했다.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강 동부 영토는 폴란드와 소련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따라서 45년간 분쟁지역이었던 국경이 통일이라는 과업을 앞두고 독일의 양보에 의해 확정된 것이다.

또다른 주제는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군대수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2+4 회의에서 독일은 병력수를 37만명을 넘지 않으며, 핵무기·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치 않는다는 조건에 합의했다.

2+4회의는 1990912, ‘독일문제 최종 해결을 위한 조약’(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 with Respect to Germany)에 합의하고, 각국의 비준을 요청했다. 합의문은 이해당사국 4개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 1991315일에 발효되었다.

별도로 열린 양독-폴란드 회담에서도 19901114일 오데르-나이세 선의 국경 획정에 합의했다.

 

독일 통일을 논의하는 2+4 회담의 첫회의(1990년 3월) /위키피디아
독일 통일을 논의하는 2+4 회담의 첫회의(1990년 3월) /위키피디아

 

마지막 남은 문제는 독일주둔 외국군 철수였다. 동독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은 1994625일 철수를 시작해 831일 헬무트 콜 통일독일 총리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참여한 가운데 마지막 부대가 베를린을 빠져나갔다. (이때 소련이 해체되었기에 러시아군이었다) 베를린에 남아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군도 비슷한 시기에 베를린에서 철수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German reunification

Wikipedia, 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 with Respect to Germany

Wikipedia, OderNeisse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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