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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이슬람 해적은 게릴라, 오스만 해군은 정규군으로 활용…최강 스페인과 대결
바르바로사 형제②…제국의 해군사령관 되다
2019. 05. 19 by 김현민기자

 

하이르 앗딘은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두고 지중해를 훑고 다닌 이슬람 해적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는 형 우르지보다 역사에 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해적임은 분명하지만, 형이 죽은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방 총독과 해군 장군으로서의 비중이 더 컸다.

1518년 형제를 모두 잃고 홀로 남은 하이르 앗딘은 스페인 군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함대가 언제 북아프리카 해적소굴로 쳐들어 올지, 전전긍긍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매달렸다. 그는 우리 해적이 점령한 북아프리카 영토를 술탄에게 드릴 터이니, 오스만의 정규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사는 길이 이것 밖에 없었다.

오스만의 셀림 1세는 하이르 앗딘을 형 우르지에 이어 알제리 총독으로 임명하는 한편 2,000명의 오스만 병사를 수도 알제로 파견했다.

오스만의 입장에서 손해를 볼 게 없었다. 북아프리카 영토를 얻은데다 해적을 해군화함으로써 소수의 병력 지원으로 서지중해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해군은 육군보다 육성, 유지, 관리에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든다. 조선소를 만들어야 하고, 전함을 건조하고, 수병을 먹여 살려야 한다. 항구도 확보해야 한다. 이탈리아에는 아말피, 피사, 베네치아, 제노바의 도시들이 상당한 해군을 확보한데다 스페인, 프랑스가 해군을 육성하고 있었다. 지상군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는 투르크 군에게는 전투력 있는 이슬람 해적을 정규군인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오스만의 술탄은 북아프리카 해적들이 개별로 행동하는 것보다 한 세력이 헤게머니를 쥐고 리더십을 갖는 것을 원했다. 그때 하이르 앗딘이 제발로 굴러와 엎드리니 술탄으로선 기뻤을 것이다.

 

하이르 앗딘이 술래이만 술탄을 알현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하이르 앗딘이 술래이만 술탄을 알현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술탄은 처음부터 앗딘에게 높은 자리를 주지 않았다. 일단 알제만 다스리는 총독자리를 줬다. 하이르 앗딘은 술탄에게 무언가 실적을 보여야 했다. 북아프리카 해적들을 리드해 유럽 기독교 국가를 교란시켜야 했다.

그는 빠르게 리더십을 확보했다. 우선 알제 항구를 모든 이슬람 해적들에게 개방했다. 독자적으로 해적활동을 하던 무리들이 알제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유태인 출신의 해적 시남도 그의 밑으로 들어 왔다. 또 과거 형 우르지가 추방했던 지방 태수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화해를 모색했다.

1519년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1세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 1세와의 경쟁을 따돌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1, 신성로마제국으로는 카를 5세가 되었다. 카를 5세는 수시로 병력을 보내 북아프리카 이슬람 해적들을 압박했다. 때론 강력한 태풍을 만나 실패하기도 했지만, 스페인군을 주력으로 하는 기독교 함대는 하이르 앗딘에게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1529년 앗딘은 알제 근처 스페인의 페논 요새를 공격했다. 포격은 보름에 걸쳐 계속되었다. 요새 안에는 스페인 수비병이 200명 있었는떼 끝까지 항전했다. 16일째 투르크 병사가 성내에 진입하면서 요새를 함락시켰다. 하이르 앗딘은 요새를 허물고 그 돌을 옮겨 알제 항구의 제방을 쌓는데 활용했다. 요새를 헐어 항구 제방을 만드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한다.

 

페논 요새 /위키피디아
페논 요새 /위키피디아

 

하이르 앗딘은 스페인 요새 파괴 이후에도 쉬지 않았다. 휘하 해적들을 이끌고 스페인 항구도시 발렌시아를 기습했다. 앗딘은 그곳에서 약탈한 대포와 미녀를 실어 이스탄불의 술탄에게 보내 진상했다. 술탄은 앗딘이 진상한 약탈품과 미녀에 만족한 게 아니었다. 해적들이 빼앗은 영토마저 진상했으니 기뻤다.

술탄은 하이르 앗딘을 이스탄불로 초대해 투르크 해군에서 가장 무용이 뛰어난 장수라고 치하하며 이미르’(amir)라는 칭호를 주었다. 아미르는 영어 ‘admiral’과 같은 의미로 해군 제독에 해당한다. 해적이 오스만투르크의 해군제독이 된 것이다.

곧이어 1534년 술탄 술레이만 1(Suleiman I)는 하이르 앗딘을 알제 총독에서 북아프리카 총독으로 승켝시키고 40척의 갤리선을 하사했다.

 

이 무렵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에 내분이 일어났다. 하산이 권력투쟁에 승리해 왕위에 올랐는데, 하산에게 원한을 품은 왕족들이 앗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이르 앗딘은 북아프리카 총독으로서 튀니지 내정에 개입했다. 그는 갤리선단을 이끌고 튀니스의 라굴레트 항을 침공했다. 하이르 앗딘의 공격 소식을 듣고 하산 왕은 튀니지를 도망쳤다. 앗딘은 무혈 입성했다. 하산은 스페인으로 도망쳐 자신이 복위하면 스페인의 속국이 되겠다며 지원군을 요청했다. 하이르 앗딘은 그 땅을 오스만투르크에 바쳤다.

서방의 카를 5세와 동방의 술레이만 술탄의 패권 대결이 눈앞에 다가왔다.

15357월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대규모 연합함대를 이끌고 튀니자 라굴레트 항을 공격했다. 총병력 25,000, 대형갤리선 90, 범선 400척으로 구성되었다. 정규 해전에서 오스만의 해군은 밀렸다. 3주에 걸친 공격에 라굴레트 항은 함락되고, 하이르 앗딘은 내륙으로 도망쳤다. 그때 해적들에게 붙잡혀 목욕장에 같혀 있던 기독교도 노예 2만명이 반란을 일으켜 퇴로를 막았다. 앗딘은 하는수 없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튀니지를 탈출했다.

이때 기독교도들도 이슬람에 못지 않은 약탈을 자행했다. 카를 5세의 군대의 만행으로 튀니지 주민의 3분의1이 죽고 또다른 3분의1이 노예가 되었다. 누가 해적이고, 약탈자인가.

 

1538년 하이르 앗단이 이끄는 오스만 해군이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함대를 패배시키고 있다. /위키피디아
1538년 하이르 앗단이 이끄는 오스만 해군이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함대를 패배시키고 있다. /위키피디아

 

튀니지를 빼앗겼지만, 술탄 술래이만은 하이르 앗딘을 오스만투르크의 해군총사령관으로 승진시켜 임명했다. 그리스 인으로 태어나 해적 활동으로 잔뼈가 굵은 남자가 대제국 정규 해군의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술탄은 그에게 200척의 갤리선을 주었다.

하이르 앗딘은 해적 두목들을 집합시켰다. 그의 직계는 물론, 분점을 차려 독립시킨 해적, 개별적으로 활동한 해적들이 모두 모였다. 그는 해적들에게 지중해를 돌아다니며 약탈행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유럽 해안에 이슬람 해적들이 출몰함으로써 튀니지를 빼앗긴데 대해 보복을 감행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기독교 연합함대의 출동력을 약화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는 해군 사령관이면서 해적 두목으로서 투르크의 정규해군과 해적을 양손에 쥐었다. 해적은 후방교란용 게릴라로 활용하고, 투르크의 정규해군은 기독교 연합함대와 전면전을 펼치는 병력으로 육성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연안 도시를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오스만투르크의 해군은 해적과 다름 없었다.

또다시 기독교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이번엔 규모가 더 컸다. 기독교 연합군은 병력 6만명, 함선 300억이었고, 오스만과 이슬람 해적은 병력 2만명, 함선 120척이었다. 두 진영은 아드리아 해에서 팽팽히 맞섰다. 서로 크지 않은 손실을 내는 것으로 끝났다. 무승부였다.

그후에도 카를 5세는 알제리 원정에 나섰지만, 태풍에 휩쓸려 무산되었다.

 

1543년 프랑스 툴롱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하이르 앗딘의 오스만투르크 전함. /위키피디아
1543년 프랑스 툴롱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하이르 앗딘의 오스만투르크 전함. /위키피디아

 

이때 중립을 지키던 프랑스가 오스만 투르크와 연합을 구성했다. 프랑스는 기독교 국가로서는 배신이었지만, 독일-스페인계 합스부르크와는 철천지 원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합이었다.

1543년 봄,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 1세는 하이르 앗딘을 공식 초청했다. 프랑스 해안을 약탈하던 해적 두목으로서가 아니라, 동맹국인 오스만투르크의 해군 사령관의 자격으로서였다. 그는 14,000명의 병력에 15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이스탄불을 떠나 프랑스 항구 마르세이유로 향했다.

그는 이탈리아 해안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선단을 둘로 나눠 한쪽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폴리아 지방을 약탈하고, 또다른 조는 레조를 습격했다. 그들은 수많은 기독교도들을 납치해 배에 실었다. 오스만 해군은 이탈리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분조를 파견하면서 주요 도시를 훑으면서 약탈과 납치를 자행했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했을 때 프랑수와 국왕과 신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르 앗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납치한 기독교도 노예를 부리며 약탈품을 하역했다. 묶여서 끌려가는 기독교도들도 있었다. 같은 기독교도였던 프랑스 구경꾼들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국왕은 하이르 앗딘의 무리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해적들이 섞여 있는 오스만투르크의 해군은 1년간 프랑스 남해안 툴롱(Toulon)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하이르 앗딘이 이끄는 오스만 해군은 프랑스 해군과 공동 작전을 펼치며 요한 기사단이 주둔한 몰타와 니스를 공격했다.

1545년 이스탄불로 돌아온 하이르 앗딘은 곧바로 해군총사령관직을 사임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546년 이스탄불 해변의 자택에서 평안하게 생을 마쳤다.

그는 1571년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에서 오스만 투르크 해군이 기독교 연합함대에게 패하기 이전까지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한 인물로 기억된다. 이스탄불 해군 박물관 인근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하이르 앗딘 바바로사 /위키피디아
하이르 앗딘 바바로사 /위키피디아
이스탄불 외곽에 있는 하이르 앗딘의 무덤. /위키피디아
이스탄불 외곽에 있는 하이르 앗딘의 무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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