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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거가문②…지기스문트, 막시밀리안을 주고객으로 삼아 성장 발판
푸거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등에 올라 타다
2021. 06. 03 by 김현민 기자

 

아버지 야코프 푸거가 낳은 아들 일곱 가운데 네명은 일찍 죽고, 막내 아들 야코프(Jakob)가 사업에 참여했을 땐 두 형 울리히(Ulrich)와 게오르크(Georg)와 함께 세 형제만 남아 있었다. 야코프는 울리히와 18, 게오르크와는 6살 차이였다. 형제는 교역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독일 뉘른베르크에 직물 공장을 경영했다. 푸거 형제들의 초기에 직물 매매에 전념했다. 회사 이름은 맏이를 앞세워 울리히 푸거 형제회사(Ulrich Fugger of Augsburg and brothers)였다.

 

막내 야코프가 두 형들에 비해 뛰어난 사업수완을 보인 것은 그가 26살 되던 1485년이다. 야코프는 형제를 대표해 오스트리아 슈바츠(Schwaz)로 갔다. 슈바츠는 티롤의 도시로 당대 최대의 은광이 개발되었던 곳이다. 슈바츠는 16세기에 아메리카 은이 유입되기 이전에 유럽 은의 85%를 생산했고, 한때 7,400명의 광부를 고용하며 인구 4만의 신흥도시로 부상해 있었다. 지금은 옛 은광이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이 지역의 통치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Sigismund) 대공이었다. 지기스문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사촌 간이었다. 그는 티롤에서 생산되는 은으로 주화를 대량으로 주조했다. 그의 은화 주조량은 로마제국 멸망후 최대였다고 한다. 그는 주화에 홀을 들고 왕관을 쓴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슈바츠의 옛 은광 /Schwazer Silberbergwerk 홈페이지
슈바츠의 옛 은광 /Schwazer Silberbergwerk 홈페이지

 

그는 땅속에서 나오는 은을 팔아 흥청망청 썼다. 화려한 궁정을 짓고 수많은 정부를 두어 혼외 자녀가 5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기스문트는 사치를 위해 늘 돈이 부족했다.

야코프는 대공에게 3,000 길더를 빌려주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이 대출은 푸거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빌려준 첫 거래였다. 아울러 푸거가는 이 거래를 통해 직물 중개업에서 금융업, 광산업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야코프는 이 거래에서 은으로 상환하도록 계약을 맺었다. 푸거가는 은 1파운드를 8플로린으로 받고, 그 은을 베네치아로 가져가 파운드당 12플로린으로 되팔았다.

지기스문트는 푸거가 이외에도 다양한 전주에게서 돈을 빌림으로써 부족한 경비를 채웠다. 그에게 푸거가는 많은 전주 중 하나에 불과했다. 푸거 가문이 오스트리아 대공의 독점적 전주가 되는 것은 지기스문트의 영토욕에서 비롯된다.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영지와 맞닿아 있는 베네치아의 영토를 욕심냈다. 그는 용병을 모집해 국경도시 몇 개를 점령했다. 하지만 전투를 지속할수록 돈이 부족했고, 베네치아가 반격에 나서자 급하게 휴전에 합의했다. 지기스문트는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배상금으로 10만 길더를 갚아야 했다. 그는 그 돈을 조달하기 위해 전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거의 모든 은행가들이 그의 요청에 고개를 저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지중해 최강국이었고, 상거래를 하는 금융인들로선 베네치아에 등을 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때 선선히 돈을 빌려준 금융가가 푸거 가문이었다. 대출 약정 체결에 야코프가 나섰다. 야코프는 지기스문트의 재정상태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상환 조건을 까탈스럽게 제시했다. 그 조건은 지기스문트가 은광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고, 광산업자들이 연대보증하며, 대출금을 할부로 지급하며, 티롤 정부의 국고 통제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지기스문트는 코너에 몰렸기에 야코프의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푸거가는 지기스문트를 거치지 않고 채권자에게 직접 채무를 상환하고, 지기스문트의 관료와 피고용자에게 봉급을 주며 사실상 티롤 정권의 재정 통제권을 행사했다. 지기스문트는 점점 더 푸거가에 의존하게 되었고, 1488년엔 푸거가에서 빌린 돈이 15만 길더에 이르렀다. 1517년 푸거가는 티롤 공공예산의 절반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티롤에서 생산되는 은과 구리에 대해 전권을 부여받게 된다.

 

지기스문트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 /위키피디아
지기스문트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 /위키피디아

 

야코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세인 막시밀리안(Maximilian)을 처음 만난 것은 1489년 프랑크푸르트의 박람회였다. 막시밀리안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로, 독일 왕의 지위에 있었고, 아버지가 죽으면 황제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조카 뻘인 막시밀리안에게도 돈을 빌렸다. 친척 간의 대출에도 담보가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영지를 담보로 잡았다.

지기스문트의 방만한 씀씀이에다 복잡한 여성관계는 티롤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티롤 귀족들은 1490년 영지를 조카 막시밀리안에게 넘길 것을 지기스문트에게 요구했다. 지기스문트도 더 이상 빚에 눌려 있을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영지를 조카에게 넘겼다. 막시밀리안은 몇 개 성(castle)과 토지를 지기스문트에게 떼어 주어 여생을 먹고 살게 해주었다.

막시밀리안은 지기스문트가 안고 있던 푸거가의 대출을 떠 앉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 대공 자리도 꿰어차게 된다.

 

이제 푸거가는 막시밀리언을 주고객으로 삼아 비즈니스를 하게 된다. 막시밀리안은 1493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한 후 예정대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막시밀리안은 교황이 자신의 머리에 황제관을 얹어주기를 원했다. 신성로마제국 역대 황제들이 독일에 거주하면서 로마를 침공한 것은 교황청에서의 성대한 제위식을 갖기 위해서였다. 막시밀리안의 군대가 로마로 진군하려면 베네치아를 통과해야 했는데, 베네치아가 프랑스와 손잡고 막시밀리안에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합스부르크는 3만의 병력을 충원해야 하고, 12만 길더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막시밀리안은 제후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는 제후국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황제는 푸거 형제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막시밀리안을 대신해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공작이 야코프를 만났다. 리히텐슈타인은 신흥섬유도시 키르히베르크(Kirchberg)와 바이센호른(Weißenhorn)을 푸거가의 영지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영지는 귀족만이 보유했다. 푸거가는 평민이었기 때문에 귀족 작호가 필요했다. 리히텐슈타인은 백작 칭호도 제시했다. 백작은 귀족의 단계를 건너뛴 고위 작호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만큼 막시밀리안은 돈이 다급했던 것이다.

일종의 매관매직이었다. 야코프는 5만 길더를 주고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1509년 푸거가는 키르히베르크와 바이센호른의 영주가 되었다. 그후에도 황제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영지를 팔아 1508년에 시미헨(Schmiechen), 1514년에 비버바흐(Biberbach)가 푸거가의 영지가 되었다.

푸거가는 50개 마을에서 징세권을 갖게 되었다. 이어 1511년에 귀족 반열에 올라 1514년에 제국 백작(Imperial Count)의 타이틀을 받게 되었다. 평범한 농민에서 시작한 푸거가는 3대만에 귀족들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도 더 이상 고리대금업자니, 장사치니 하면서 깔보지 않게 되었다.

 

지기스문트 대공(왼쪽)과 막시말리안 1세 /위키피디아
지기스문트 대공(왼쪽)과 막시말리안 1세 /위키피디아

 

야코프 형제들이 막시밀리안과 거래에서 승승장구할 때, 큰집이었던 안드레아스(Andreas Fugger)의 아들들은 막시밀리안에게 속아 멸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안드레이스의 아들 루카스(Lukas)도 막시밀리안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플랑드르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플랑드르 납세자들은 막시밀리안에게 조세납부를 거부함으로써 루카스는 대출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결국 루카스 형제들은 파산하고 말았다.

두 가문의 차이는 리스크테이킹에 있었다. 울리히의 형제들은 상환이 어려운 대출을 절대로 피했는데 비해 루카스 형제들은 설마 대귀족이 돈을 갚지 않으랴는 안이함에 빠져 있었다. 루카스 형제들은 울리히 형제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울리히와 야코프는 사촌들을 도와줄 여력이 있었지만, 그 요청을 거절했다. 사촌 형제들은 칼부림까지 하며 항의했지만, 울리히 형제들은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다만 조상의 고향인 그라벤에 가서 농사를 지으라며 오두막집 한 채를 사주었다고 한다. 돈의 세계는 비정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Jakob Fugger

Wikipedia, Fugger family

Wikipedia, Sigismund, Archduke of Austria

Wikipedia, Maximilian I, Holy Roman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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