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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거가문④…성직거래, 교황선출에도 개입, 한자동맹 견제도 개별 격파
교황청 자금거래와 사업 떠맡은 푸거 형제들
2021. 06. 06 by 박차영 기자

 

푸거 가문이 교황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야코프의 형 마르쿠스(Markus)가 사제가 되어 교황청에 근무하면서부터였다. 푸거 형제들은 마르쿠스를 통해 각국에서 걷은 헌금을 로마로 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마르쿠스가 일찍 죽는 바람에 교황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 틈을 비집고 이탈리아 은행들이 교황청 송금시장을 잠식해 들어왔다.

15세기는 교회의 전성기였고, 교황청 자금이 최대의 돈줄이었다. 푸거 형제들은 마르쿠스의 빈자리를 요하네스 칭크(Johannes Zink)로 채웠다. 칭크는 푸거의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교황청에서 문서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푸거 형제들은 그를 로마 교황청 대리인으로 채용했다. 칭크는 푸거 형제들이 기대하는 이상으로 사업 수완이 좋았다. 칭크의 상술은 교황청 간부들에게 두루 뇌물과 선물을 주며 선심을 쓰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은행들은 푸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푸거 은행은 유럽 전역에 지점을 두었기 때문에 손쉽게 교황청 헌금 수송을 장악했다. 당시 교황청 헌금은 수레에 실어 이송되었는데, 도적들에게 강탈당하기 일쑤였다. 교황청은 안전한 헌금 수송을 해줄수 있는 은행을 찾았다. 푸거 은행은 지점을 통해 계좌이체라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교황청 헌금 수송을 따낼수 있었다. 푸거 은행은 헌금수송의 대가로 3%의 수수료를 뗐다. 푸거에게 교황청 거래는 가장 안정적인 수익처였다. 푸거의 송금이체사업은 동유럽, 스웨덴, 프랑스로 확대되었다.

푸거가는 교황청 선거에 돈을 풀었다. 야코프는 율리우스 2(Julius II) 선거 자금으로 5,000 플로린을 기부했고, 추기경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덕분에 율리우스 2세는 무난하게 교황이 되었다. 1504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스위스 용병으로 근위대를 창설했는데, 그 비용은 푸거가의 자금으로 충당했다. 푸거가는 병사들의 임금을 지급했다.

푸거 은행은 또 교황청의 화폐 제카(Zecca)를 주조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푸거가는 교황청 주화에 가문의 상징인 ‘F’를 새겨넣었다.

 

교황청의 스위스 용병 근위대 /위키피디아
교황청의 스위스 용병 근위대 /위키피디아

 

푸거가는 성직자 매매에도 개입했다. 교회가 부패할대로 부패한 시절이었다. 성직자는 좋은 직업이었다. 세금은 한푼도 내지 않고 교인들의 충성을 담보로 편안하게 보낼수 있었다. 성직에 대한 수요는 많았고,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자리 값이 비쌌다. 성직매매를 시모니(Simony)라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 성령의 축복을 사려고 한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이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푸거의 로마대리인 칭크는 푸거가의 돈으로 56개의 성직을 매입했다. 칭크는 한 도시에서는 공증인이었고, 다른 도시에서는 교황 기사였다. 그는 대리인을 시켜 그 자리의 임무를 맡기고 자신은 로마에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어느 한 수사가 48 길더를 주고 상급 성직자리를 사려고 했는데, 푸거 형제들은 그 자리를 자신의 조카에게 주어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그 수사가 왜 내게 그 자리를 팔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 자리가 로마에서 780 길더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수사는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 푸거 형제를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했지만,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단테가 교황 니콜라스 3세에게 성직매매자를 지옥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그림 /위키피디아
단테가 교황 니콜라스 3세에게 성직매매자를 지옥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그림 /위키피디아

 

메히오르 폰 메카우 /위키피디아
메히오르 폰 메카우 /위키피디아

 

야코프의 형제들은 교회의 엄청난 험금을 예금으로 활용했다. 독일 추기경 멜히오르 폰 메카우(Melchior von Meckau)는 자신이 관장하는 자금을 푸거 은행에 예치했다. 하위 성직자나 교인들은 아무도 추기경이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예치해 두었는지를 몰랐다. 푸거는 예금자에게 연 5%의 이자를 약속했기 때문에 교회의 자금은 안정적인 푸거 은행을 선택했고, 메카우도 마찬가지였다. 푸거가는 그 돈으로 연 20%의 수익률을 냈기 때문에 평균 마진율은 연 15%나 되었다.

1509년 메카우가 사망했다. 메카우는 푸거 은행의 최대 예금주였다. 그가 맡긴 돈은 20만 길더였고, 이자까지 합치면 30만 길더에 이르렀다. 이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제아무리 푸거 은행이라도 파산할 가능성이 컸다.

메카우가 죽자 수사들은 그의 유품에서 영수증을 찾아내 푸거 은행에 30만 길더의 예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이 주인을 잃은 상태에서 실체를 드러내자,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서로 그 돈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교황과 황제였다.

교황 율리우스는 추기경의 소유는 모두 교회의 소유이므로, 교황청에서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는 메카우 추기경의 자금이 자신의 영지 티롤에서 나온 이익금이므로, 자신의 소유라고 했다.

푸거 형제들은 예금액이 누구의 소유든, 은행에서 뭉치 돈이 빠져나갈 것을 걱정했다. 한꺼번에 거액의 자금이 빠져나가면 은행은 일종의 뱅크런(bank run)을 맞게 되어 심각한 자금경색에 빠지게 될 우려가 있었다.

푸거 형제들은 로마의 로비스트 칭크를 앞세웠다. 칭크는 교황과 황제가 대립각을 세우도록 유도했다. 칭크의 농간에 황제는 분쟁이 종결될 때까지 자금을 인출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교황은 돈을 차지할 가능성이 줄어들자 실망했다. 이때 푸거 형제들은 교황의 개인 계좌에 3만여 길더를 찔러 주었다. 교황은 더 이상 돈 문제에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에겐 교회의 자산은 세속의 권력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푸거 은행은 거액의 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회생의 기회를 찾게 되었다.

 

한자동맹 가입 도시 /위키피디아
한자동맹 가입 도시 /위키피디아

 

푸가가문이 세력을 확장하자 견제세력도 많아 졌다. 그 중 하나가 북유럽 해상무역을 지배하던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었다. 한자동맹은 함부르크, 브레멘, 쾰른, 단치히(폴란드 그단스크), 리가(라트비아) 노브고르드(러시아) 등지의 도시 100여개를 회원으로 끌어들여 동맹을 맺고 해상운송 카르텔을 형성했으며, 뤼베크(Lübeck)를 수도로 삼았다.

1510년 네덜란드 선박 한척이 단치히를 출항해 항해하던 중에 한자동맹 소속 함대에 나포되어 화물을 탈취당했다. 약탈당한 화물은 푸거의 헝가리산 200톤이었다. 한자동맹은 전함을 보유하고 카르텔의 영역을 침범하는 선박에 대해 포격을 가하는 무력집단이었다. 그들은 발트해와 북해를 자신들의 안마당이라 생각했다. 푸거가는 그동안 대리인을 내세워 단치히 항을 통해 화물을 수송했는데, 한자동맹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무력을 통해 푸거가를 견제하고 나선 것이다.

이 시기에 한자동맹은 쇠락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이 노브고르드를 점령, 동쪽에서 압박하고 스웨덴과 덴마크가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한자동맹의 주수입원이었던 청어 어장이 발트해에서 네덜란드 앞바다로 이동해 큰 타격을 받았다.

푸거 형제들은 한자동맹과 전면전은 피하고 각개격파 전술을 채택했다.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한자동맹 카르텔의 일방조치에 항의, 중재를 이끌어 내는 한편 교황을 통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정적 해결책은 동맹 도시의 개별적 이해관계를 파고든 것이었다. 푸거가는 한자동맹에 적대적인 폴란드 귀족들을 설득해 단치히의 수송계약을 맺었다. 에스토니아의 리가도 푸거가의 물건 수송에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함부르크도 푸거가의 화물을 싣겠다고 나왔다. 푸거의 거래물량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도시라도 무시할수 없는 여건이었다. 푸거 가문은 아무런 견제 없이 발트해 항구를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푸거 형제 가운데 게오르크는 1506년이 죽고, 이어 장자인 울리히도 1510년에 세상을 떠났다. 형제 가운데 막내 야코프만 남았다. 아코프에겐 자식이 없었다. 1512년 야코프는 조카들에게 지분 참여를 허락하고, 회사를 야코프와 조카들’Jakob Fugger and nephews)로 변경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Simony

Wikipedia, Melchior von Meckau

Wikipedia, Hanseatic League

Wikipedia, Jakob Fug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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