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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거가문⑤…합스부르크 결혼 중매, 자금 지원, 영토확장에 기여
합스부르크, 푸거은행 돈으로 결혼전략 성공하다
2021. 06. 07 by 김현민 기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지금의 스위스 북부 자그마한 영지에서 출발했다. 합스부르크가 유럽 역사에 등장한 것은 1273년 루돌프가 독일왕에 선출되면서였다. 알프스의 시골뜨기 영주가 독일왕이 된 것은 왕이 두 명 존재하는 대공위시대(1245~1273)를 거치면서 독일의 유력 제후들이 힘 없는 자를 올려놓고 흔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루돌프는 허울뿐인 독일왕 자리를 이용해 보헤미아왕에게서 오스트리아를 빼앗았다. 스위스가 독립하면서 합스부르크는 고향의 영지를 잃었지만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것은 1452년 프리드리히 3세였다. 프리드리히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신성로마제국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앞서 제국의 헌법이라 할수 있는 금인칙서(Golden Bull)가 발표되어 황제는 7명의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도록 규정되었다. 제국의 지방분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황제의 권위는 무력했다. 어느 유력 가문도 황제가 되기 꺼려할 때 합스부르크에 귀챦은 자리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합스부르크는 남들이 싫어하는 황제 자리를 기회로 활용했다. 황제를 꿰어찬 후 알프스 산골의 가문은 유럽의 유력 왕실과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 합스부르크는 황제 자리를 이용해 결혼동맹을 추구했다. 다른 왕조는 전쟁으로 땅을 넓힐 때, 합스부르크는 결혼에 몰두했다. 정략결혼의 시대였다.

 

합스부르크의 초대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은 결혼 동맹을 통해 대제국을 일궜다. 그 결혼은 모두 푸거 가문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이뤄졌다.

첫 번째는 프리드리히가 아들 막시밀리안을 부르고뉴 공작의 딸 마리와 결혼시켜 베네룩스를 차지한 것이다. 이 결혼식에 푸거 형제들은 황실 가족에 화려하고 값 비싼 의복을 제공해 합스부르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직물상들이 모두 의상 제공을 거절하는 와중에도 푸거 가문은 합스부르크의 장래를 예견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황제 막시밀리안이 아들 펠리페를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 사이에 낳은 공주 후아나와 결혼시키고, 딸 마르가레트를 황태자와 결혼시킨 것이다. 조건은 어느 한 가문의 후손이 단절되면 다른 가문이 상속을 하는 것이었다. 이 이중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는 스페인을 차지하게 된다. 이 결혼에도 푸거 형제들이 자금을 빌려주었다.

 

막시밀리안 황제와 그의 아내 마리, 아들 필리페, 손자 카를, 페르디난트, 루이스 /위키피디아
막시밀리안 황제와 그의 아내 마리, 아들 필리페, 손자 카를, 페르디난트, 루이스 /위키피디아

 

합스부르크의 세 번째 결혼 공략 대상은 헝가리였다. 앞서 두 번의 결혼에서 푸거가는 수동적 역할을 했다. 합스부르크와 인연을 맺고,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결혼 자금을 대주었다. 세 번째는 푸거 가문이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합스부르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푸거는 헝가리에 광산을 소유했다. 특히 헝가리 노이졸(Neusohl) 광산은 오스트리아 티롤의 슈바츠 광산에 버금가는 수익을 냈고, 이외에도 헝가리 각지에 구리광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위대한 군주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 왕이 1490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이후 헝가리는 심각한 내란에 빠졌다. 푸거 가문이 투자한 광산도 위협받았다.

푸거가는 자신의 재산을 지켜야 했다. 방법은 헝가리 왕조를 안정화시키는 것이었다. 야코프 푸거는 한때 적대적인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왕조를 결혼시켜 평화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푸거는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헝가리와 동맹을 맺지 않는다면 대출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막시밀리안은 야코프를 달래야 했다. 헝가리 왕가도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호가 필요했다. 두 왕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푸거 가문의 중재로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왕가의 결혼동맹 협상이 진행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막시밀리안 황제와 울라디슬로(Władysław) 헝가리 국왕 그의 동생인 폴란드 지기스문트(Sigismund) 국왕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서 협의기로 했다.

1515,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헝가리-보헤미아왕, 폴란드왕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이 자리에 야코프 푸거도 참석했다. 요즘으로 치면 정상회담이다. 빈 회담에서 두 가지가 논의되었다. 첫째는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폴란드의 결혼동맹 체결이었고, 둘째는 헝가리 내 푸거 광산의 안정적 경영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손자 페르디난트를 헝가리와 보헤미아 국왕의 딸 안나에게 결혼시켰다. 또 손녀 마리를 헝가리-보헤미아 황태자 라요쉬 2(Lajos II)와 결혼시켰다. 이 이중결혼으로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까지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결혼 비용은 푸거 은행에서 나갔다. 겹사돈 결혼이어서 비용도 곱절로 들었다. 푸거는 헝가리 광산의 소유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결혼 비용을 대출로 잡아 금융자산을 확대했다. 결혼은 합스부르크의 승리였지만, 푸거의 승리이기도 했다.

 

1515년, 막시밀리안 황제(가운데)와 지기스문트 폴란드왕(오른쪽), 울라디슬로 헝가리왕의 빈 회담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1515년, 막시밀리안 황제(가운데)와 지기스문트 폴란드왕(오른쪽), 울라디슬로 헝가리왕의 빈 회담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막시밀리안은 결혼동맹을 통해 합스부르크의 영지를 크게 늘리는데 성공했다. 그는 힘없는 황제 자리를 활용해 합스부르크를 유럽 최고의 가문으로 일으켰고, 서유럽과 중부유럽는 물론 스페인이 개척한 아메리카대륙, 필리핀도 손에 넣었다.

하지만 황제는 말년에 병마에 시달렸다. 1501년 그는 낙마 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아들 펠리페는 1506년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 게다가 막시밀리안은 매독에 걸려 갈수록 심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55세이던 1514년부터 그는 관을 준비하고 영지를 순방했다고 한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손자 카를에게 매달렸다.

카를은 어머니 마리의 고향인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자랐다. 카를은 스페인 국왕과 네덜란드 군주를 맡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어는 유창했지만 독일어를 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독일에 아무런 작위가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어권의 느슨한 연방체였다.

막시밀리안은 죽기 직전에 황제 자리를 손자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대를 이어 물려주는 것이 아니었고, 금인칙서 규정에 의해 7명의 선제후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손자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선제후를 설득해야 했다. 황제는 오랫동안 합스부르크와 거래한 푸거 은행에서 선제후의 표를 살 자금을 빌릴 작정이었다.

 

16세기초 합스부르크 영지 /위키피디아
16세기초 합스부르크 영지 /위키피디아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Francis I)는 카를이 황제가 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카를이 스페인과 베네룩스, 부르고뉴를 차지하고 황제마저 된다면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에 의해 포위된다. 따지고 보면 카를도 독일의 영주가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독일인이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대공위 시대에 영국 왕실의 콘웰 백작 리처드(Richard of Cornwall)와 카스티유 국왕 알폰소(Alfonso)가 외국인으로 독일왕을 겸직한 선례가 있었다.

프랑스와는 막시밀리안이 죽으면 황제 선거에 뛰어들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그는 스페인 국왕(카를)이 출마하는데, 프랑스 국왕이 경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황제 선출이 단독 후보 출마에서 경선체제로 전환되면서 선제후들은 떡고물을 노렸다. 어차피 독일 영주 후보가 없는데, 누가 황제가 되든 상관 없었다. 선제후들은 뇌물을 많이 주는 군주면 표를 주겠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최대 은행은 푸거 은행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벨저 가문, 이탈리아 은행이 푸거와 경합했고, 프랑스 국왕도 엄청난 세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푸거 가문은 앞서 세 번 합스부르크 결혼에 간여했다. 이번 황제 선거에도 푸거가문이 합스부르크를 지지할지 여부가 최대의 관전 포인트였다.

 


<참고자료>

Wikipedia, Maximilian I, Holy Roman Emperor

Wikipedia, Jakob Fugger

Wikipedia, 1519 Imperial election

그레그 스타인메츠, “자본가의 탄생”, 부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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