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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거가문⑥…합스부르크, 프랑스와 영국 왕가의 대결에 결정권 행사
야코프 푸거, 황제 선출에 패를 흔들다
2021. 06. 08 by 김현민 기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은 7명의 선제후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독 출마를 하거나, 경선을 할 경우에 7명 중 4명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7명의 선제후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주교 3명과 팔츠, 작센, 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의 영주 4명이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막시밀리안의 손자 카를(Karl)과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François I)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판도는 33이었다. 3명의 주교는 프랑스왕을 지지하고, 팔츠-작센-보헤미아의 영주 3명이 카를에게 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캐스팅보트를 쥔 자는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Joachim) 선제후였다. 요아힘은 두 경쟁자 중에서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줄 출마자를 찍겠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 왕은 요아힘에게 현찰 플러스 육촌 누이 르네 공주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요아힘은 후에 독일 제국을 형성하는 호엔쫄레른(Hohenzollern) 가문으로 당시엔 유럽에서 2류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집안에서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와 결혼한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요아힘은 프랑수아에 기울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르네 공주가 독일 시골로 시집가기 싫다며 프랑스의 공작과 결혼해 버렸다. 이때 카를이 요아힘에게 자신의 누이 카타리나와 결혼시키고 이에 더해 30만 길더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발루아 왕가에 못지 않는 명문가였다. 금액도 어마어마했다. 카를은 푸거 은행에 손을 내밀어 그 돈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요아힘은 프랑스왕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카를에게로 돌아섰다.

그러던 중에 카를은 언제까지 푸거 가문에 끌려 다녀야 하는지에 의문을 품고 벨저 가문과 이탈리아-스페인 은행에서 그돈을 마련할 것을 추진했다. 이 소식이 푸거 은행의 수장 야코프 푸거의 귀에 들어갔다.

 

7명의 선제후. 왼쪽부터 쾰른, 마인츠, 트리어 주교, 팔츠, 작센, 브렌덴부르크, 보헤미아 선제후(1340) /위키피디아
7명의 선제후. 왼쪽부터 쾰른, 마인츠, 트리어 주교, 팔츠, 작센, 브렌덴부르크, 보헤미아 선제후(1340) /위키피디아

 

1519112일 막시밀리안 황제가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했다. 야코프는 전령을 보내 황제의 서거 소식을 프랑수아에게 알렸다. 이는 황제 선거에서 프랑스 국왕에게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푸거가 카를에게 돈을 대지 않고 프랑스 국왕에게 대출한다면 프랑수와는 자금력에서 카를의 우위에 설수 있게 된다. 야코프는 푸거 은행과 거래를 끊으려는 카를에게 경고한 것이기도 했다. 야코프는 카를과 프랑수아에게 양다리를 걸침으로서 황제 결정권의 패를 쥐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황제 선출은 선제후 7명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돈을 가진 은행가가 결정한다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었으리라.

프랑수아는 푸거 은행에 30만 에퀴(369,000 길더)를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의 세입에서 우선 상환하고 수수료로 3만 에퀴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야코프는 이 소식을 합스부르크에 흘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펄쩍 뛰었다. 푸거 은행이 저쪽으로 붙으면 자금력에서 밀린다. 돈에 걸신이 들린 선제후들이 프랑수아를 지지할 것이 분명하다. 고모 마르가르테가 나서서 카를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았다. 조신들도 함께 나섰다. 결국 카를은 푸거 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삼겠다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왼쪽부터 합스부르크의 카를,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 영국왕 헨리 8세. /위키피디아
왼쪽부터 합스부르크의 카를,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 영국왕 헨리 8세. /위키피디아

 

또다른 변수가 생겼다.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 레오 10(Leo X)가 영국 국왕 헨리 8(Henry VIII)에게 황제 선거에 참여하라고 권유한 것이다. 교황은 합스부르크나 프랑스 왕가에서 황제가 선출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수시로 이탈리아를 침공해 교황을 압박했다. 특히 프랑스군은 그 무렵 스위스군을 격파하고 밀라노를 점령해 있었다. 교황은 영국 국왕이 황제가 된다면 적어도 이탈리아를 침공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레오 10세는 헨리 8세에 앞서 작센의 프리드리히 공작에게 출마를 권했지만 작센 공작은 교황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방향을 바꿔 영국 국왕을 부추긴 것이다.

헨리 8세는 교황의 천거에 고무되었다. 영국왕은 리처드 페이스(Richard Pace)를 특사로 임명, 독일에 파견해 선제후들을 만나게 했다. 페이스가 차례로 선제후들을 만났는데, 대부분의 선제후들이 영국 국왕에게 호의적이었다. 영국 왕실에서는 일찍이 콘웰 백작 리처드(Richard of Cornwall)가 독일왕에 오른 적이 있었다. 선제후들의 입장에선 돈만 많이 준다면 누가 황제가 되든지 상관 없었다. 경쟁자가 많아질수록 몸값이 높아질 터이니, 영국왕의 출마를 반겼다.

 

카를 5세 /위키피디아
카를 5세 /위키피디아

 

선거는 황제가 죽은지 5개월 후인 1519628일 프랑크푸르트 성당에서 열렸다.

합스부르크는 독일 군중을 선동했다. 카를은 스페인 국왕이자 네덜란드 군주였음에도 오스트리아 출신임을 강조했다. 합스부르크는 프랑스왕이 황제가 되면 독일을 침공할 것이란 소문을 퍼트렸다.

군중들은 선거에 참여하는 프랑스인들을 찾아내려고 혈안이었다. 영국왕의 특사로 온 페이스는 선거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투표는 공포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성당 밖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원한 인파가 에워싸고 있었다.

프랑수와는 독일 기사 프란츠 폰 지킹겐(Franz von Sickingen)에게 뇌물을 주어 병력을 동원하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합스부르크에게 충성했다. 지킹겐의 병사들은 독일인 군중들과 함께 카를을 외치는 구호에 동참했다.

투표 결과, 카를이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프랑수와를 지지할 것처럼 보였던 선제후들이 모두 카를로 돌아선 것이다. 선제후들이 독일 군중의 인종주의 소동에 겁을 먹었는지, 합스부르크의 뇌물에 순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선제후 모두가 푸거 은행이 돈을 내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푸거 가문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로써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Carlos I)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Karl V)로 등극하게 된다.

 

1520년 스페인에서 코무네로스 반란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520년 스페인에서 코무네로스 반란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선거가 끝나고 정산이 진행되었다. 7명의 선제후에게 돌아갈 금액은 모두 85만 길더로 집계되었다. 이중 푸거 가문의 몫은 55만 길더, 웰저 가문(Welser family)15만 길더, 나머지는 이탈리아 은행에게 돌아갔다. 역사상 최대의 대출이었다.

야코프 푸거는 그렇게 많은 대출을 하면서 광산권과 세수 등의 담보를 잡지 않았다. 무담보 신용대출이었다. 그는 프랑수와와 줄타기를 하면서 대범한척 했지만 카를의 당선에 연연해 했음을 보여주었다.

야코프는 막시밀리안과 달리 카를이 스페인 국왕인 점에 착안했다. 스페인은 당시 멕시코와 페루에서 엄청난 금과 은을 걷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코르테스(의회)는 생각이 달랐다. 국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빌린 자금을 스페인이 상환할 이유가 없었다.

스페인 의회는 마지못해 증세를 승인했지만 조세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세고비아의 양털 노동자들이 세금 인상에 항의해 시청을 점거했고, 시위는 톨레도, 토르데시야스, 바야돌리스 등지로 환산되었다. 반란자들은 자치조직을 만들어 스스로를 코무네로스라고 부르며 납세거부운동을 벌였다. 이 반란을 코무네로스 반란(Revolt of the Comuneros)이라고 한다.

카를 5세는 반란자들을 하나씩 제압했으나,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카를은 스페인에서의 증세를 취소했다. 결국 푸거 은행이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하게 된 것이다.

카를은 태양이 지지 않은 제국을 건설했지만,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섰다. 1521년 카를 황제가 야코프 푸거에게 진 빚이 60만 길더에 이르렀다. 카를은 이중 415,000 길더를 분할상환하고, 오스트리아 티롤의 광산을 푸거에게 양도하는 것에 서명했다.

1522년 뉘렌베르크 제국의회에 푸거 은행을 비난하는 안건이 상정되었다. 일부 의원들은 푸거를 노상강도에 비유하며 악덕 금융업자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코프 푸거는 화가 났다. 1523년 야코프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서신을 작성했다. 상대는 신성한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국왕, 나폴리국왕, 예루살렘국왕, 부르고뉴공작, 네덜란드 군주,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군주 등 무려 81개 칭호를 가진 카를 5세였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제가 없었다면 당신은 황제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빌려드린 돈에 이자까지 계산해 지체없이 상환하도록 명하십시오.”

감히 일개 장사꾼이 황제에게 이런 무엄한 편지를 쓸수 있었던가.

 


<참고자료>

Wikipedia, 1519 Imperial election

Wikipedia, Joachim I Nestor, Elector of Brandenburg

Wikipedia, Franz von Sickingen

Wikipedia, Jakob Fugger

그레그 스타인메츠, “자본가의 탄생”, 부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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