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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전쟁에서 패배, 정치적 연줄 끊어지며 파산…전형적인 官商
휘상 호설암, 권력과 결탁해 거대한 부 일구다
2021. 06. 11 by 김현민 기자

 

중국 명·청기를 주름잡은 양대 상인그룹이 진상(晋商)과 휘상(徽商)이다. 진상은 산시(山西)성을 근거지로 중국 북부의 상권을 장악했고, 휘상은 안후이성(安徽省) 휘주(徽州)를 고향으로 해서 중국 남부의 강과 바다의 상권을 휘어잡었던 상단이다.

휘상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후쉐옌(胡雪巖, 1823~1885)이다. 그의 인생 역정은 파란만장하다. 가난뱅이에서 일약 중국 최대 부호로 성장했다. 그는 상인계급으로는 청조에서 유일하게 홍정상인(紅頂商人)으로 임명되어 붉은 모자를 쓰고, 1품의 고위관직까지 올라갔다. 서태후의 지시로 자금성에 말을 타고 입조하는 특혜도 누렸다.

그는 살아있을 땐 활재신(活財神), 즉 살아있는 재물의 신으로 추앙받았고, 죽어서는 상신(商神), 즉 상업의 신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관과 결탁한 전형적인 관상(官商)이었을 뿐이다. 그는 마지막에 투자에 실패해 몰락하고 만다국내에는 소설 호설암이 번역되기도 해 여기서는 호설암으로 칭하기로 하자.

 

후쉐엔(胡雪巖, 1823~1885) /위키피디아
후쉐엔(胡雪巖, 1823~1885) /위키피디아

 

호설암은 1823년 안후이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광용(光墉), 자는 설암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아버지에게서 겨우 글을 읽고 쓰기 정도만 배웠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고 12살 되던 해, 그는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로 건너가 신화전장(信和錢莊)이라는 금융회사에 취직했다. 전장은 진상의 표호(票號)와 같은 금융기관으로, 호설암은 그곳에서 청소와 빨래, 밥짓기등 허드렛일을 했다. 3년간의 견습기간이 끝나고 돈을 다루는 사환으로 승진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모험을 한다. 허름한 찻집에서 울분에 차 있는 왕유령(王有齡)이란 유학자에게 아무런 담보도 없이 수금한 은 500냥을 빌려줬다. 회사돈을 횡령해 거렁뱅이 학자에게 돈을 준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직장에서 쫓겨난 것은 당연지사,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왕유령은 그 돈으로 벼슬을 사서 절강성 해운국 좌판(坐辦)이라는 자리를 꿰어차고 부임했다. 선박운송을 관리하는 자리였는데, 왕유령은 호설암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그 조직의 돈을 맡겼다. 호설암은 그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왕유령은 저장성을 총괄하는 순무(巡撫)까지 올라갔는데,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호설암은 많은 돈을 관리하며 자신의 사업을 불려 나갔다. 그는 자신을 쫓아낸 신화전장의 경쟁사로 부강전장(阜康錢莊)이란 은행을 설립했다. 그의 영업은 전형적인 관() 중심의 장사였다. 관의 사업을 이용해 개인적 부를 형성한 부도덕한 케이스다.

 

호설암의 옛집(저장성 항저우) /위키피디아
호설암의 옛집(저장성 항저우) /위키피디아

 

그에게 더 큰 기회가 왔다.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이 터졌다. 장사꾼에게 전쟁은 기회다. 이 무렵 저장성 순무였던 왕유령은 반란군이 항저우를 점령하자 자살했다. 하지만 한족 유림들이 만주족 청()나라를 위해 진압부대를 조직해 거병하면서 반란군을 제압해 나갔다. 그 중심에 증국번(曾國藩)이라는 유학자가 있었고, 좌종당(左宗棠)과 이홍장(李鴻章)이 반란군 진압에 주도적으로 공을 세웠다.

태평천국의 난이 진입된후 죽은 왕유령의 자리를 좌종당이 차지했다. 저장성 순무로 부임한 좌종당은 호설암을 불렀다. “그대에게 부탁이 있소. 10만 위안을 마련해 주시오. 나라를 위해 무기를 구입해야 하오.”

그는 두말하지 않고 돈을 모으러 동분서주했다. 영국의 스탠더드차타드 중국지점에 찾아가 돈을 빌리고, 거기에 자신의 돈을 보태 거액을 마련해 좌종당에게 빌려줬다.

좌종당은 호설암이 가져온 돈으로 군량미와 무기를 비축했다. 대신에 호설암에게는 군함을 짓는 조선소를 맡겼다. 조선소는 사실상 호설암의 개인회사처럼 운영되었다.

광서 3(1877)에 좌종당이 신장지역 회족(위구르족)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을 때 호설암은 서양식 무기를 구매해 조달하고 자금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청나라 황실에서도 호설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10여년 이상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해 1품 관직인 홍정상인(紅頂商人)이란 직위를 내려주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가 철저한 나라에서 붉은 산호가 박힌 모자를 수여 받았는데, 역대 상인으로는 최고의 출세였다.

 

호설암이 설립한 호경여당 /위키피디아
호설암이 설립한 호경여당 /위키피디아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관과 결탁해 번성하던 그의 사업은 관에 의해 무너졌다.

1880년대 초 베트남(安南)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가던 프랑스와 종주국인 청나라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전쟁에 앞서 무역규제가 행해진다. 사드 배치에 대해 중국이 한국에 보여준 태도나 마찬가지다.

청 조정은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산 물자를 통제하며 서양 상인들을 조여갔다. 그 중 하나가 비단의 원료인 생사(生絲)였다. 이를 생사 대전(1882~1883)이라고도 한다.

호설암은 이 싸움에 뛰어 들었다. 그는 중국 전역의 생사를 사들였다. 조정을 등에 업은 매점매석 행위였다. 그는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나라를 위해 돈을 쏟아부어 한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유럽 상인들이 혼돈에 빠졌다. 생사 값이 폭등했다. 유럽 상인들은 호설암에게 생사를 달라고 아우성쳤다. 호설암은 거금 1,200만냥을 가져 오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고 배짱을 부렸다.

유럽인들은 호설암의 베팅에 말려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 밀리면 가격결정권을 잃는다는 인식도 있었고, 유럽과 중국 사이에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중국 상인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위기의식도 있었다. 유럽 상인들은 1년을 버텼다. 새로 생산된 생사가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호설암은 이듬해 나온 물량을 사들일 자금이 부족했다. 그때 이탈리아에서도 생사가 풍년이 들었다.

그 무렵 청나라에 권력 다툼이 발생했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때 동지였던 이홍장과 좌종당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이홍장은 좌종당의 돈줄인 호설암을 쓰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생사모집에 나섰던 상인들을 부추겨 매집을 거부하게 했다. 게다가 이홍장의 사주를 받은 부하들은 청나라 정부 자금을 호설암의 금고(부강전장)로 예치하지 않게 된다. 호설암은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로 몰렸다.

호설암은 완패했다. 그의 사업에 금고역할을 했던 전장(錢莊)에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이었고, 자금이 고갈됐다. 뱅크런(bank run)이 발생한 것이다. 호설암은 결국 파산했다. 그의 수호천사였던 좌종당도 이홍장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린데다 청불전쟁에 패한후 1885년 사망했다.

그는 실기약창(雪記藥廠)이라는 약국을 설립해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약품을 제공하고 남는 것은 가난하나 사람에게 거져 주었다. 설기약창은 강남 일대에 점포를 늘려 호경여당(胡慶余堂)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의 사업은 권력에 의지해 재산을 모았다가 권력에서 소외되면서 망한 케이스다. 그는 파산후 부의 덧없음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파산 1년후인 1885년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던 저장성 항저우의 옛집은 2001년에 복원되어, 지금은 관광객에 개방되고 있다. 그가 세운 약국 호경여당도 관광지가 되었다.

 


<참고자료>

维基百科, 胡雪巖

Wikipedia, Hu Xue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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