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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가문②…페더만이 엘도라도 찾았으나 금은 없었고, 스페인에 정복지 뺏겨
엘도라도 신기루 좇다 실패한 벨저 가문
2021. 06. 14 by 김현민 기자

 

16세기초 유럽 탐험가들 사이에 엘도라도(El Dorado) 열풍이 불었다. 아즈텍과 잉카 이외에 또다른 황금의 제국이 있다는 소문에 탐험가들은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되겠다는 열망에 불탔다.

베네수엘라 식민지를 얻은 독일의 벨저가문은 알핑거와 페더만의 탐험에도 불구하고 엘도라도를 찾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벨저가의 수장 바르톨로메우스 5세는 좌절하지 않았다. 바르톨로메우스는 알핑거가 병 치료를 마치고 복귀하자 2차 원정에 나서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알핑거는 15319월에 무장군인 130, 40마리의 말, 인디언들을 이끌고 2차 엘도라도 원정에 나섰다. 2차 원정대는 남쪽으로 향하다가 1,000개 오두막으로 이루어진 원주민 거주지를 발견했다. 그들은 금을 다루었다. 알핑거 일행은 무력으로 원주민의 금을 빼앗고 금이 나는 곳을 알려달라고 협박했다. 파카부아이에스(Pacabueyes) 부족으로 알려진 이 원주민들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금이 엄청나게 많은 쿤디나마르카(Cundinamarca)라는 곳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알핑거 대원들은 그곳이 엘도라도라고 믿었다.

알핑거는 인디언 노예를 보강해 쿤디나마르크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곳곳에서 인디언들이 나타나 전투를 벌여야 했고, 혹독한 날씨로 말들이 죽어 나갔다. 식량도 떨어졌다. 그들은 말과 개를 잡아 먹으며 사투를 벌였다. 출발한지 19개월 되던 15335월 원정대는 치나코타 계곡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치타레로족(Chitareros)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527일 알핑거는 치타레로족이 쏜 독화살을 맞고 3일후에 숨졌다. 원정대장이 죽자 대원들은 코로(Coro) 기지로 돌아갔다.

 

엘도라도 탐험대와 원정로 /위키피디아
엘도라도 탐험대와 원정로 /위키피디아

 

알핑거의 두 번째 원정이 실패하자 바르톨로메우스 벨저는 알핑거의 경쟁자로 베네수엘라에서 추방되었던 니콜라우스 페더만을 총독으로 보내 엘도라도 탐사를 계속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스페인 식민 당국에 페더만의 총독 부임을 반대했다. 페더만이 스페인의 허락 없이 탐사를 한 전력을 걸고 넘어진 것이다.

벨저가는 어쩔수 없이 또다른 총독을 물색했는데, 게오르크 호어무트(Georg Hohermuth)가 선택되었다. 그는 벨저 기업에서 은행원으로 출발했으며, 베네수엘라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다만 벨저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엘도라도 원정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벨저는 페더만에게 스페인의 눈치를 보아가며 조만간 총독으로 임명할 터이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호어무트는 유럽에서 600명의 용병을 조직해 베네수엘라에 도착했다. 그는 총독 자리가 페더만에게 넘어가기 전에 황금의 나라를 차지하고 싶었다. 코로 기지에 도착한 그는 현지에서 인력을 보강해 750명으로 병력을 확대했다.

호어무트는 페더만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과히라 반도에 기지를 건설하라고 지시한 다음 15355400명의 대원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섰다. 원정대는 황금의 나라가 있다는 안데스 고원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호어무트는 길을 잘못 들렀다. 그는 호전적인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았고, 오리노코 강으로 추정되는 거센 강물에 길이 막히기도 했다. 대원들은 열대성 열병에 걸려 쓰러져 갔다. 식량도 떨어졌다. 대원들은 돌아가자고 호어무트를 협박했다. 그는 3년 반에 걸친 황금 사냥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가 1539년초 코로 기지에 도착했을 때, 남은 대원은 80명에 불과했다.

무이스카 문화의 황금 유물(모형) /위키피디아
무이스카 문화의 황금 유물(모형) /위키피디아

 

한편 과히라 반도에서 기지를 건설하던 페더만은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이제나저제나 총독 임명장이 오길 기다렸다. 누군가 벨저가가 보낸 임명장을 감췄다고 한다. 아마 호어무트 측의 계략일 가능성이 컸다.

페더만은 코로 기지로 돌아가 대기하던 중에 153712월에 3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섰다. 그는 호어무트 대원들을 찾아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호어무트 부대 주둔지를 가깝게 스치기는 했지만 조우하지 못한채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도 인디언의 공격을 받았고, 험준한 산맥과 강을 건너야 했다. 호어무트 일행은 페더만 대원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고 따라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페더만은 마침내 목적지를 찾는데 성공했다. 15393월 그는 200여명의 대원과 함께 전설적인 엘도라도의 고향, 쿤디나마르카에 도착했다.

 

곤살로 데 케사다 /위키피디아
곤살로 데 케사다 /위키피디아

 

페더만 일행이 감격을 누리기는 잠시, 그곳에 이미 다른 탐험대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인 곤살로 데 케사다(Gonzalo Jiménez de Quesada)가 이끄는 탐험대였다. 케사다는 스페인의 산타마르타(현재 콜롬비아의 해안도시) 총독 지시로 800명의 대원을 꾸려 1536년 엘도라도를 찾아 나섰다. 케사다 일행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170명만 남긴채 페더만보다 두해 전인 1537년에 쿤디나마르카에 도착했다. 케사다는 꿈에도 그리던 땅을 밟고 나는 카를 5세 황제의 이름으로 이 땅을 소유하노라고 외쳤다. 그는 그곳의 이름을 그라나다(Granada)로 명명했다. (스페인은 지금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를 뉴그라나다 부왕령으로 구획해 통치했다.)

유럽인에게 엘도라도 또는 쿤디나마르카로 알려진 곳엔 무이스카(Muisca) 제국이 있었다. 이 제국은 여러 부족이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무이스카인들은 잉카나 아즈텍, 마야 제국과 달리 거석문화를 형성하지 않고 초목으로 집을 짓거나 바위와 동굴에서 거주했다.

케세다가 무이스카에 도착했을 무렵, 그곳에는 두 개의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케세다는 170명의 병력으로 현지인들을 제압하기 어려워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 상대방을 제압한 후 다른 한쪽을 제압하는 방식을 썼다.

케세다의 병사들이 원주민을 공격하던 중에 무이쿠이타(Muyquytá)의 왕 티스케수사(Tisquesusa)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는 유럽인들에게 엘도라도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병사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티스케수사는 부상당한채 피신했다가 산중에서 사망했다. 케사다 대원들은 무이스카에서 금과 은, 보석 등을 강탈했지만,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믿었던 금광은 찾지 못했다. (케세다는 무이쿠이타의 바카타(Bacatá)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Bogota).)

 

무이스카 제국 /위키피디아
무이스카 제국 /위키피디아

 

케세다 원정대가 무이스카를 점령한지 1년 후에 2개의 탐험대가 엘도라도를 찾아 왔다. 첫 번째가 벨저가가 파견한 페더만의 일행이었고, 곧이어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하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사르(Sebastián de Belalcázar)100명의 대원을 이끌고 나타났다.

세 정복자들은 협정을 맺었다. 인디언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서양인들끼리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케세다와 페더만의 병력 수가 비슷했고, 벨랄카사르의 병력은 열세였다. 케세다와 페더만은 권력을 공유했으나, 상전이 있는 일개 장교에 불과했다. 그들이 차지한 정복지가 누구의 것이 되는지는 결국 스페인 국왕이자 황제인 카를 5세가 결정할 사안이었다.

케세다와 페더만은 스페인으로 가 황제의 결정을 기다렸다. 벨저 가문은 카를 5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려줄 것을 기대하며 넉넉하게 대출을 주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뉴그라나다 어딘가에 황금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15409월 황제는 뉴그라나다를 스페인령으로 결정하고 산타마르타 총독 관할로 귀속시켰다. 결국 벨저는 헛물만 켰다.

 

엘도라도를 찾지 못하고 먼저 베네수엘라로 돌아간 호어무트는 병이 들어 총독직 사표를 내고 귀국하려던 차에 경쟁자인 페더만이 쿤디나마르크를 발견하고 스페인에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벨저가에 페더만의 잘못을 비판하고, 카를 5세에게도 호소문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한채 1540년에 숨졌다. 40살이었다.

한편 벨저가문은 뉴그라나다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자, 페더만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다. 벨저는 페더만에게 1만 두카트의 에메랄드와 15,000 두카트의 금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만한 보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벨저의 소송으로 안트워프 감옥에 갇혔다. 페더만은 맞소송을 제기해 벨저가가 스페인에 세금을 탈루했다고 주장했다. 벨저도 페더만과 싸우다가 베네수엘라 이권을 잃을 것을 우려해 타협점을 찾았다. 페더만도 오래살지 못했다. 그는 15422월 스페인의 감옥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졌다. (다음으로 계속)

 


<참고자료>

Wikipedia, Welser family

Wikipedia, Ambrosius Ehinger

Wikipedia, Nikolaus Federmann

Wikipedia, Georg von Speyer

Wikipedia, Gonzalo Jiménez de Quesada

Wikipedia, Muisca Confe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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