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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천트 뱅크의 효시, 로스차일드와 함께 영국 금융계 양대산맥
베어링가①…대영제국과 함께 은행업 성장하다
2021. 06. 18 by 김현민 기자

 

베어링 은행은 1762년에 창업해 1995년 파산하기까지 230년간 존속한 영국 은행으로, 한때 여왕의 은행’(Queen's Bank)라 불릴 정도로 대영제국의 상징이었다. 베어링 은행(Barings Bank)은 유대계 로스차일드 은행과 양대산맥을 이루며 나폴레옹 전쟁에 영국 승리를 이끌었고, 미국의 루이지애나 매입등에 간여했다. 그러던 베어링은 1890년 아르헨티나 투자에 실패해 구제금융을 받았고, 1995년에 닉 리슨(Nick Leeson)이라는 트레이더의 사기 거래로 인해 파산했다. 이 은행은 네덜란드 금융그룹 ING에 단돈 1파운드에 매각되어 사라졌다.

 

베어링 은행의 성쇠는 대영제국과 운명을 같이 했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에 은행은 정점에 달했고, 영국의 몰락과 함께 은행도 쇠퇴했다.

베어링 은행은 1762년 프랜시스 베어링(Francis Baring, 1740~1810))에 의해 창업되었다.

존 베어링 /위키피디아
존 베어링 /위키피디아

베어링 가문(Baring family)의 뿌리는 독일이다. 프랜시스의 아버지 요한 바링(Johann Baring, 1697~1748)은 태어나 외가에서 생활했다. 요한의 외가는 독일 북서부 브레멘(Bremen)에서 양모 거래를 했다. 요한은 20살이 되던 1717년 외가의 지원을 받아 영국 엑세터(Exeter)에 파견되었다. 요한은 엑세터에서 양모 무역상의 도제로 상업을 배우다가 독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1723년에 영국에 눌러 앉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름을 영어식 존 베어링(John Baring)으로 바꾸고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존은 엑스터의 부자 상인의 딸 엘리자베스 바울러(Elizabeth Vowler)와 결혼했는데, 아내는 2만 파운드나 되는 거액의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존은 사업 수완이 좋은데다 처가의 유산에 힘입어 런던에 지점을 두고 사업을 확대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해외무역이 번창했다. 존 베어링은 양모 거래 이외에도 다양한 상품을 거래했고, 금융산업, 대외무역에도 참여했다. 존은 당시 이문이 좋았던 노예거래에도 손을 댔다.

 

프랜시스의 아버지 존이 죽은 후 어머니 바울러가 엑세터의 사업을 떠맡았다. 존과 바울러 사이에는 아들 넷과 딸 하나가 있었다.

프랜시스는 셋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15살이던 프랜시스를 런던에 보내 7년 동안 무역회사에서 도제수업을 받게 했다. 그는 수리적 재응이 뛰어났고, 상업의 흐름을 잘 이해했다고 한다. 도제수업을 마친 1762, 그는 어머니로부터 엑세터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엑세터보다 런던이 좋았다. 마침 베어링 가문과 거래하던 무역업자가 은퇴하면서 자기 회사를 인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프랜시스는 형제들과 가문의 사업을 정리했다. 형제들은 엑세터의 사업을 동생 찰스에게 맡기고, 프랜시스는 런던 사업을 맡기로 합의했다. 둘째형 토머스는 이때 사망했고, 큰형 존은 프랜시스의 런던 회사에 참여했다.

 

프랜시스는 1762년 런던에서 존&프랜시스 베어링(John and Francis Baring & Co)를 세웠다. 이 회사가 베어링 은행의 출발이다.

사업은 잘 되지 않았다. 특히 동생 찰스는 무모한 투자를 하는 바람에 엑세터의 사업은 적자더미에 휘말렸고, 그 부담이 런던 회사로 고스란히 밀려왔다. 프랜시스는 동생이 하는 엑세터의 베어링사와 단절했다. 형 존은 1776년 하원의원에 선출된 이후 가문의 사업에 간여하지 않았고, 프랜시스가 사실상 업무를 총괄했다.

 

프랜시스 베어링(왼쪽)과 형 존 베어링(가운데), 조카 찰스 월 /위키피디아
프랜시스 베어링(왼쪽)과 형 존 베어링(가운데), 조카 찰스 월 /위키피디아

 

처음 10여년간은 고생을 했다. 시장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만 파운드로 시작한 회사는 1777년에 2,500파운드로 줄어 있었다. 하지만 사업실패는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실패를 통해 시장 흐름을 이해했고, 신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신뢰를 쌓은 덕분에 1771년 영국 왕실이 설립한 보험회사 로열엑스체인지어슈어런스( Royal Exchange Assurance)의 대리인이 되었다. 그는 이 공적 지위를 바탕으로 영업을 확대해 1780년에 자본금을 2만 파운드로 회복할수 있었다.

그가 무역금융에 뛰어들 때 영국은 네덜란드를 꺾고 해상지배권을 장악했다. 영국과 서인도제도, 이베리아반도,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대서양 패권은 영국에게 넘어갔다. 베어링 은행은 머천트 은행(merchant bank)의 효시로 꼽힌다. 베어링 은행은 환어음과 탁송화물 거래, 선적 및 창고 알선 등 무역어음을 총괄했다.

베어링 은행은 돈되는 사업이면 모두 뛰어들었다. 노예무역에도 참여했다. 미국 메인주의 부동산에도 투자했다.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유럽에는 멕시코에서 선인장에 기생하는 코치날(연지벌레)에서 색소를 추출해 염색에 활용했는데, 프랜시스는 유럽의 코치날(cochineal )을 매점매석했다. 하지만 가격이 오르지 않아 손해를 보았다.

베어링 은행은 1780년대부터 급성장했다. 자본금이 1790년에 7만 파운드로 증가했고, 연간 수익도 1790년대에 4만 파운드에서 18022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 그는 파트너들에게 자본금의 4~5%의 배당을 지급했다. 프랜시스는 런던금융가에서 빠르게 거물로 부상했다.

 

은행 로고 /위키피디아
은행 로고 /위키피디아

 

프랜시스는 런던 정계의 인맥을 다져 나갔다. 유대계 로스차일드가 소수민족의 한계로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있을 때 베어링 가문은 쉽게 영국 정가와 인연을 맺었다. 프랜시스의 형 존과 매제 존 더닝(John Dunning)은 일찍부터 정계에 진출,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가족의 도움으로 보수당(휘그)의 거물 셸번 경(Lord Shelburne)과 친분을 쌓았다. 셸번 경은 1782~1783년에 총리가 되었는데, 프랜시스는 셸번 총리의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다.

프랜시스는 영국 정부의 무력 사용을 반대했다. 그는 셸번 경이 총리일 때 미국 독립을 인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셸번은 프랜시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미국 독립을 허용했다.

런던 정가와의 인연으로 그는 영국 정부의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프랜시스는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군의 식량 보급 사업에 참여, 큰 이문을 남겼다. 그는 한편에선 미국을 독립시키자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영국군에 보급품을 대 돈을 번 것이다. 그는 동인도회사에도 이사를 맡았고, 1792~1793년 동인도회사의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은 베어링은행을 급성장시켰다. 영국정부는 이 전쟁에 막대한 물량의 전쟁공채를 발행했는데, 베어링 은행은 12번이나 참여해 19만 파운드의 수익을 창출했다. 베어링은 영국 전쟁비용 조달의 핵심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이 은행은 정점에 올랐다.

반프랑스 전선에 있던 나라도 베어링에 손을 내밀었다. 프랜시스는 채권발행을 위해 런던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를 찾아가봐야 소용없다. 나와 이야기 하자,”고 했다. 포르투갈은 베어링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1,300만 길더의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

베어링은 영국 정부가 프랑스 몰래 동맹국에 지원하는 지원금을 수송하는 역할도 했다. 베어링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뚫고 영국에 협조하는 나라들에 자신의 사업망을 통해 영국이 지원하는 금과 물제를 전달했다.

 

프랜시스는 일생 동안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은행을 연 호프 가문(Hope family)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염색 색소 코치날을 매점할 때도 호프가와 협조했고, 거액의 협조융자를 일으킬 때에도 호프사(Hope & Co)의 도움을 청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연결한 두 가문의 금융동맹은 프랜시스 일생동안 흔들리지 않았다. 1795~1803년 나폴레옹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호프사는 런던으로 건너와 베어링에 의탁했다. 프랜시스는 두 가문을 혼맥으로 연결해 도버해협을 가로지르는 금융망을 형성하려 했다. (다음으로 계속)

 


<참고자료>

Biography, Francis Baring

Wikipedia, Johann Baring

Wikipedia, Sir Francis Baring, 1st Baronet

Wikipedia, Baring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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