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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링가③…관리감독 결여, 네덜란드 ING에 1파운드에 매각
트레이더 한 사람 실패에 베어링 은행 파산하다
2021. 06. 20 by 김현민 기자

 

1890년 베어링 위기(Baring crisis)는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신화를 창출했다. 베어링 은행은 너무 컸기 때문에 파산하면 베어링만의 파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영국이란 국가와 세계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질 것이란 공감대를 형성했다.

영국 중앙은행의 구제금융과 동료은행들의 협조금융으로 베어링 은행은 옛 은행의 자산을 정리하고 새 은행으로 회생했다. 지배구조도 파트너십에서 유한회사(limited liability company)로 전환되었고, 베어링 가문이 개인 자산을 매각해 참여함으로써 가문의 은행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위기 이후 베어링은 런던 금융가에서 2부 리그로 추락했고, 영국 왕실의 금융기관으로 존재 의미를 유지할 뿐이었다. 베어링 가문은 회장직은 유지했지만 경영에는 손을 떼고 은행업무는 전문 뱅커에게 맡겼다.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글로벌 금융계에 빅뱅의 시대가 도래했고, 왕실과 정부, 부유한 상인과 거래해 수익을 냈던 머천트 뱅크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머천트 뱅크로 출발한 베어링 은행도 투자은행(investment bank)로 변신을 시도했다. 금융공학을 전공한 트레이더들을 고용하고 선물투자 부문에도 진출했다.

 

싱가포르 거래소에서 트레이딩 하는 닉 리슨 /닉리슨 홈페이지
싱가포르 거래소에서 트레이딩 하는 닉 리슨 /닉리슨 홈페이지

 

베어링 은행의 마지막 회장은 창업자의 12대 피터 베어링(Peter Baring)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은행 업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방문객에게도 은행 귀족으로서의 도도함을 유지했을 뿐, 은행과는 거리를 두었다. 아랫사람들도 그에게 은행일을 보고하지 않았다. 1995년은 그가 은행정관 상 임원으로서의 마지막 해였다.

그해 2월 피터는 석간신문을 보고 자신의 은행이 위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닉 리슨(Nick Leeson)이라는 스물여덜살 트레이더가 싱가포르에서 대형 투자에 실패한 사실이 드러나 은행이 파산의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은행 총수도 모른채, 직속상관에게도 보고하지 않은채 젊은 트레이더의 장부 조작과 투자 실패로 한때 대영제국 최대은행이었던 베어링 은행이 233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파산하고 말았다.

 

싱가포르 거래소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거래소 /위키피디아

 

닉 리슨은 1967년 영국에서 태어나 10대 후반에 조그마한 은행에 은행원으로 취직했다. 20세가 되던 1897년에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서 파생금융을 거래했다. 2년후인 1899년에 베어링 은행으로 옮겨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생활하며 홍콩을 다녀오기도 했다.

1992년 베어링 은행이 싱가포르 국제통화거래소(SIMEX)에 선물거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닉 리슨을 파견했다. 리슨의 나이는 당시 25, SIMEX 데스크에서 총괄매니저라는 지위에 올랐다. 싱가포르로 떠나기 앞서 그는 영국에서 보고서 누락 혐의로 증권브로커 자격증을 상실했다. 리슨과 베어링은 싱가포르 당국에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앟았다.

거래 첫해에 리슨은 투기적 거래에 성공해 1,000만 파운드의 수익을 내 베어링의 연간 수익 10%를 벌어 주었다. 그해 그는 13만 파운드의 보너스를 받았는데, 봉급 5만 파운드의 2.6배였다.

그는 이 높은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 계좌를 개설했다. 숫자 ‘8’을 다섯 개 나열한 ‘88888’이란 계좌였는데, 리슨은 손실이 난 투자를 이 비밀 계좌로 밀어 넣어 자신의 투자가 항상 높은 수익률을 낸 것처럼 위장했다.

리슨은 이 비밀계좌를 개설한 이유에 대해 부하 트레이더가 일본 후지은행 선물거래에서 실패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그 트레이더가 낸 손실은 2만 파운드에 달했다. 하지만 리슨은 자신이 실패한 투자도 이 계좌를 이용해 분식했다.

이 비밀계좌에 분식된 금액은 1993년말에 2,300만 달러, 1994년말엔 2800만 달러로 불어났다. 만일 이때라도 베어링 은행이 이 사실을 적발했거나, 리슨이 자진신고했더라면 베어링의 자산 3억 달러로 상계처리하면 되었기에 적어도 은행이 파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여년 역사의 베어링 은행은 이 무렵 감독체계가 없었다. 사기업으로 운영되던 시절에는 오너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하급직원들의 투자를 감시했지만, 유한회사로 전환한 뒤에 오너 가문은 형식적으로 간부직만 차지했을 뿐 영업과 투자는 전문가에게 맡겼다. 전문 경영인들은 실적에만 급급할 뿐, 회사 경영과 관리는 등한시했다. 멀리 싱가포르 트레이딩 룸은 런던의 관리감독에서 벗어나 있었다.

 

리슨은 내친 김에 더 크게 일을 벌렸다. 그는 한번 손해를 보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두배의 물량을 투자했다. 이 투자는 대단히 위험하다. 성공하면 투자손실을 메우고 이익을 내지만 실패하면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리슨이 마지막으로 덤빈 것은 도쿄증권거래소였다. 19951월 그는 스트래들(straddle)이란 투자를 동원했다. 일정기간 금융상품 가격이 오르거내 내릴 것을 기대하며 투자하는 방식으로, 도쿄 증시와 싱가포르 증시의 가격차를 이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116일 그는 내일 도쿄 증시가 그다지 변동이 없을 것으로 보고, 수익이 나는 방향에 투자를 걸었다. 불행하게도 117일 새벽 546, 일본 고베에서 진도 6.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최대의 지진이 발생하며 6,000여명의 인명 피해가 나고 도쿄 주가는 급락했다. 리슨의 투자는 큰 손실을 보았다.

리슨은 투자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두배의 돈을 끌어들여 이번엔 도쿄 주가가 하락하는 쪽에 베팅을 걸었다. 또 그에게 불행이 닥쳤다. 도쿄 주가는 지진 이틀후에 급등했다.

리슨은 더 이상 회복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손실액은 82,700만 달러로, 베어링 은행 자산의 두배를 넘었다.

베어링 은행은 100여년만에 다시 영국 정부에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 베어링은 구제할만한 대마(大馬)는 아니었다. 베어링은 파산해도 영국 경제와 금융시스템에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은행으로 전락해 있었다. 큰 은행은 살리고, 작은 은행은 죽여도 된다는 이 역설의 논리가 두 번째 구제금융을 무산시켰다.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 /위키피디아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 /위키피디아

 

224일 닉 리슨은 책상 위에 죄송하다”(I'm sorry)는 한마디 메모만 남기고 싱가포르를 떠났다. 그는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거쳐 독일에 입국했다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체포되어 싱가포르로 압송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았다. 혐의는 상부에 투자를 보고하지 않은 것과 회계장부를 조작한 것이었다. 그는 66개월 형을 받고 싱가포르에서 복역하다가 형기의 3분의244개월 째 되던 19997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일대기와 투자이력을 담은 자서전 악덕 트레이더’(Rogue Trader)를 출간했다. 이 책은 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베어링 가문의 마지막 회장 피터 베어링은 뒤늦게 리슨의 사기 투자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영국 중앙은행은 구제금융을 거부했고, 피터는 직원들에게 보너스도 주지 못했다. 1995226일 베어링 은행은 파산을 선언했다. 은행은 곧바로 법원이 파견한 관리인에 의해 통제되었다. 2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베어링 은행은 네덜란드의 ING 그룹에 1파운드 가격에 매각되었다.

베어링 은행은 트레이더 한사람의 투자 실패로 무너졌다. 본질적으로 영국 왕실과 국가를 상대로 하던 귀족 은행이 다수를 상대로 한 현대적 트레이딩으로 전환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상부엔 귀족적 품위를 유지하는 인물이 앉아 있고, 아래엔 트레이더들이 컴퓨터 자판으로 순식간에 거래했다. 베어링은 그 괴리를 메우지 못했다. 관리감독이 없었다는 것은 늙은 금융제국의 한계였다. 귀족의 복장으로 트레이딩 룸을 관리한 격이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Barings Bank

Wikipedia, Nick Lee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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