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보수적 경영, 파트너 책임 하의 투자…숱한 위기 극복하며 430년 존속
세계서 가장 오래된 베렌베르크 은행의 영업비밀
2021. 06. 21 by 김현민 기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머천트 뱅크는 독일 베렌베르크 은행(Berenberg Bank)이다. 1590년에 함부르크에서 설립되어 43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은행은 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홍콩의 HSBC, 덴마크의 단스케 은행(Danske Bank), 스웨덴 한델스방켄(Handelsbanken), 노르웨이 베르겐스방크(Bergens Privatbank)에도 초기투자자로 참여했다. 독일 해운회사 하파크로이트(Hapag-Lloyd AG)도 이 은행의 투자에 의해 설립되었다.

베렌베르크 은행은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런던,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뉴욕 등 세계금융중심지에 지점을 두고 있으며, 현재 1,6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정식 명칭은 요-베렌베르크-고슬러 회사(Joh. Berenberg, Gossler & Co. KG), 아직도 동업체계(partnership)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동업자는 가문의 일원이다.

중세에 창업한 이 은행이 독일의 숱한 정치적 변곡과 세계질서 재편의 혼란을 이겨내며 현대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보수적 경영이다. 파트너들이 책임을 지고 투자를 결정하고, 철저하게 은행을 관리하고 감독한다.

 

1600년대 함부르크 /위키피디아
1600년대 함부르크 /위키피디아

 

베렌베르크 은행의 오너십을 행사해온 베렌베르크-고슬러 가문(Berenberg-Gossler family)은 함부르크 상인들이 결혼을 통해 형성한 집안이다.

원뿌리는 베렌베르크 가문(Berenberg family)이다. 베렌베르크 가문은 지금의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무역상을 하던 상인계급으로 고가 옷감을 비롯해 귀금속, 포도주, 향신료 등을 팔았다. 가문은 프로테스탄트였는데, 당시 카톨릭의 수호자로 벨기에 일대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대립했다. 종교전쟁을 거치면서 가문은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인지,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인지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1585년 안트워프가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스페인군에 함락되면서, 베렌베르크 가문은 엘베강 하구의 자유도시였던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베렌베르크가의 한스(Hans)와 파울(Paul) 형제는 1590년 함부르크에서 회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을 시작했다. 형제의 사업재개를 베렌베르크 은행의 시초로 본다. 형제는 함부르크에서도 의류와 다양한 상품을 거래했고, 대부업에도 참여했다. 한스의 손자인 코르넬리우스(Cornelius Berenberg, 16341711)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머천트 뱅크로 전환했다.

요한 힌리히 고슬러 /위키피디아
요한 힌리히 고슬러 /위키피디아

세월이 흘러 1768년 가문의 수장인 파울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의 동생 요한(Johann)은 아들이 없고 딸 엘리사베트(Elisabeth)를 두었다. 남성으로 가계를 이어가던 베른베르크 가문에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가문의 결정은 사위에게 가문과 가업을 잇게 하는 것이었다. 사위를 통해 가문을 계승하는 경우는 독일계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철강그룹 크루프 가문도 채택한 방식이다.

베른베르크 가문은 함부르크의 또다른 상인 집안인 고슬러 가문(Gossler family) 출신 요한 힌리히 고슬러(Johann Hinrich Gossler, 173890)를 엘리사베트의 남편으로 골랐다. 1771년 요한 힌리히는 처가의 사업을 맡아 무역업을 확장하고 금융업을 키워 회사를 번창시켰다. 그는 회사 이름에 양가의 성을 넣어 현재의 상호(Joh. Berenberg, Gossler & Co. KG)로 바꾸었다. 이 상호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요한 힌리히는 사위 루드비히 E. 자일러(Ludwig Erdwin Seyler)를 파트너로 받아들여 베른베르크 가업에 또다른 가문이 합류하게 되었다. 엘리사베트와 요한의 손자 고슬러 3세는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 성을 베렌베르크-고슬러로 변경했고, 1880년 함부르크 시정부도 이를 허가했다.

 

19세기말, 분열되었던 독일이 프로이센으로 중심으로 통일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베렌베르크 은행은 빠르게 성장가도를 달렸다.

요한 하인리히 고슬러 3세는 항구도시 함부르크를 통해 독일과 미국 간 무역이 크게 성장하는 점을 포착해 무역금융에 뛰어들었다. 베렌베르크 은행은 19세기 중엽에 무역업자에게 신용장을 주었다. 신용장을 통해 수출기업들은 상품을 선적, 운송하고 하역시킨 후에 대금을 받던 관행보다 앞당겨 상품을 배에 실은 후 대금을 받도록 함으로써 자금회전의 이익을 보게 되었다.

요한 하인리히 고슬러는 미국에 지점을 개설하고 미국과 독일을 연결하는 여객선 항로를 열었다. 그 항로에 연락선을 띄웠는데, 당대 최대 대서양여객선 회사인 함부르크어메리카라인(Hamburg America Line, HAPAG)이다. 이어 북독일 여객선 회사 로이트(Norddeutscher Lloyd)를 설립했다. 이 두 회사는 나중에 하파크로이트(Hapag-Lloyd AG)로 합병된다.

베렌베르크 은행은 기업 상장에 참여해 상장기업의 유가증권을 인수했다가 가격이 오른 후에 팔아 상당한 이윤을 챙겼다. 상장 기업을 선택할 때 경영자들의 직감을 활용했다. 성공할 기업과 실패할 기업을 베렌베르크 경영자들은 정확하게 판단했다.

19세기 중반에 베렌베르크 은행의 자산은 100만 마르크를 넘었고, 독일에서 가장 큰 대부은행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베렌베르크-고슬러 가문은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 가문의 문장은 베렌베르크가문을 상징히는 곰과 고슬러 가문을 상징하는 오리로 구성되어 있다.

 

베렌베르크-고슬러 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베렌베르크-고슬러 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1차 대전에 패배한 이후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 화폐개혁의 수렁에 빠졌다. 19세기에 2,000개나 되었던 독일의 은행들은 극심한 경제혼란을 겪으며 10%만 살아 남았는데, 베렌베르크는 든든한 자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생존자 대열에 포함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이 독일에 밀려오고, 나치 정부가 수립되었다. 베렌베르크 은행은 다름슈타트은행과 합병했다. 그런데도 합병은행은 생존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드레스트너방크와 통합되었다. 이때 베렌베르크-고슬러 가문은 자신들의 지분을 돌려받고 은행의 명맥을 유지했다.

나치시대에 베렌베르크 은행은 일체의 사업에서 손을 떼고 지주회사로만 살아 남았다.

2차 대전 종전후 나치 정권이 붕괴되고 독일엔 연합군 군정이 시작되었다. 베렌베르크 은행은 1948년에 영업을 재개했다. 독일이 패전의 수렁을 극복하고 라인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부흥의 시대를 맞아 베렌베르크는 국내외에 맺었던 과거의 관계를 되살렸다. 1960년대엔 파트너 이외에도 개인 주주들도 유치해 복합적인 지배구조를 형성했다.

 

베렌베르크 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 /위키피디아
베렌베르크 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 /위키피디아

 

베렌베르크 은행이 4세기 이상 영업을 유지해온 것은 보수적 경영전략 때문이다. 이 은행은 금융위기에 당황해 하지 않았다. 파트너들이 개인적 책임을 지고 신중하게 투자를 결정했다. 투자를 결정할 때 그 근거를 꼼꼼히 따졌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위기, 2010년 유럽 재정위기에서도 이 은행은 건실함을 유지했다.

베렌베르크 은행은 1990년 창립 400주년을 맞아 사회봉사활동을 추구하는 공익재단을 창설했다. 재단은 젊은 예술인, 학자를 선발해 시상한다.

 


<참고자료>

Wikipedia, Berenberg Bank

Wikipedia, Berenberg family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