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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무라 경영개혁으로 현대화…전후 해체되었다가 다시 결합
미쓰이家②…메이지유신 후 최대 재벌로 부상
2021. 06. 23 by 김현민 기자

 

1854년 에도막부가 미국 흑선의 포함에 굴복하자,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복권시키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목소리를 높였다. 열도가 천황파와 막부파로 갈라져 내란의 국면을 맞았을 때, 막부의 어용상인으로 성장한 미쓰이가(三井家)는 긴장했다. 8대 당주(當主) 미쓰이 다카요시(三井 高福)는 막부와 조정 사이를 오가며 눈치를 살폈다.

정치적 대격변기에 가문의 수장인 다카요시가 가장 잘 한 일은 뛰어난 경영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의 선택은 미노무라 리자에몬(三野村利左衛門)이었다.

미노무라는 주인이 없는 사무리아, 즉 낭인(浪人)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그는 큐수와 교토를 전전하다가 막부의 재정장관 수하로 들어가 어용자금을 관리했다. 그러던 중에 거래처인 미쓰이측 담당자의 눈에 들어 1866년 미쓰이에 취직했다.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천황이 에도막부로부터 통치권을 돌려받았다. 권력의 향배가 바뀌자 미쓰이 가문은 신정권에 줄을 대기 위해 다방면으로 뛰었다. 이때 미노무라가 막부에서 근무할 때 맺은 인맥을 살려 미쓰이와 유신정권을 연결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노무라는 이런 인연으로 미쓰이 경영을 총괄하는 번두(番頭)로 올라섰다. 이 직책은 오너 가문 이외의 사람에게 회사 운영을 맡기는 전문경영인으로, CEO에 해당한다.

 

다카토시가 개설한 에치고야본점 기념관 /위키피디아
다카토시가 개설한 에치고야본점 기념관 /위키피디아

 

막부 시절에 번창한 기업의 다수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도산했다. 미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쓰이는 막부 자금을 환전하고, 그 돈을 융통해 옷장사를 했다. 장남을 당주로 삼아 가계를 이어왔고, 지주회사인 오모토카타(三井大元方)를 통해 점포를 지배했다. 일족에게는 헌법과 같은 규정을 강요했다. 가족 독점 기업은 막부 시절에는 성공했지만, 유신정권이 추진하는 산업화를 따라가기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막부 자금의 환전업무가 끊어지면서 미쓰이 경영에 타격이 왔다. 게다가 서양에 항구를 개방하는 바람에 질 좋은 서양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포목점 경영도 위축되었다.

 

미노무라는 유신정부의 핵심인사에게 줄을 대 미쓰이 경영에 코드를 맞췄다. 메이지 정부도 산업화를 추진하는데 자금이 모자랐다. 해외자금을 유치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국내 자본을 산업자금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미쓰이 자본을 산업자금으로 활용하려는 메이지측 구상과 일본의 산업화를 추수하겠다는 미노무라의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

미노무라는 메이지 정부가 막부 잔당과 마지막으로 벌인 보신전쟁(戊辰戰爭, 1869~1869)을 계기로 일본군에 물자 납품과 운송에 대한 독점권을 따냈다. 이를 통해 미쓰이의 경영악화를 개선시킬수 있었다. 미노무라는 또 미쓰이 일족과 경영자들을 미국에 연수보내 선진경영기법을 배우도록 했다. 이들이 돌아와서 미쓰이를 선진화하는데 일조한다.

그는 미쓰이의 주업인 의류업을 금융업과 분리할 것을 추진했다. 막부 시절엔 두 업종이 일체로 움직였지만, 산업혁명의 시대엔 이질적인 업종이었다. 미노무라는 금융업을 미쓰이 재벌의 모기업으로 삼고, 전통적인 포목점은 오너 가문이 맡도록 분리했다.

그는 미쓰이 그룹이 더 이상 미쓰이 가문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되고, 주주와 직원의 회사가 되도록 미쓰이를 주식회사로 전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미쓰이 현대화를 추진하다가 1877년 위암으로 56세로 사망했다. 그는 미쓰이재벌을 중흥시킨 장본인이며,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미노무라의 구상에 따라 미쓰이는 금융, 무역, 의류 부문으로 갈라진다. 1876년 미쓰이는 일본 최초의 민영은행으로 미쓰이은행을 설립해 유신초기 외무장관을 지내다 권력갈등에서 밀려난 마스다 다카시(益田孝)를 경영자로 초빙했다. 곧이어 미쓰이은행이 출자해 무역회사 미쓰이물산을 창업했다. 두 회사는 모두 주식회사로 설립되었다.

미쓰이는 1909년 지주회사격인 미쓰이합명회사(三井合名會社)를 세우고 은행과 무역업을 중심으로 하는 재벌의 형태를 갖췄다. 이후 광산업과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중화학 분야에도 진출했다. 1920년대에 미쓰비시는 150개의 자회사를 둔 거대한 콘체른으로, 일본 최대 재벌로 부상했다.

 

도쿄 니혼바시의 미쓰코시 백화점 본점 /위키피디아
도쿄 니혼바시의 미쓰코시 백화점 본점 /위키피디아

 

미쓰이 가문의 전통가업인 포목점은 백화점으로 변신했다.

기모노 판매점으로 창업한 에치고야 오복점(越後屋 呉服店)1904년 회사의 명칭을 미쓰이(三井)와 에치고야(越後屋)의 머리글자를 합쳐 미쓰코시 오복점’(三越呉服店)으로 바꾸었고, 백화점으로 전환했다. 미쓰코시는 1905년부터는 매장의 배치를 바꾸고 화장품ㆍ모자 등의 품목도 다루었다. 또 배달용 자동차도 최초로 도입했다. 1907년에는 신발과 양산 등의 품목도 추가했고, 니혼바시의 본점에 식당과 사진관 등도 개설했다. 1911년에는 전화 주문을 받기 시작했으며, 1914년에는 니혼바시의 본점에 신관을 세웠다. 1928년에는 회사의 명칭을 주식회사 미쓰코시로 바꾸었다.

미쓰코시는 조선에도 진출해 1906년 서울에 임시출장소를 개설했고, 1916년에는 명동에 지점을 열어 영업을 시작했다. 미쓰코시는 19301024일에는 지하 1, 지상 4층의 건물을 새로 짓고,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의 영업을 시작했다. 1층에서는 화장품ㆍ신발 등을 팔았고, 2층에서는 일본의 전통 의상, 3층에서는 서양 의상을 팔았고, 4층에서는 귀금속과 가구 등을 팔았다. 식당도 있었다.

미쓰코시 경성점은 해방 후 몰수되어 동화백화점(東和百和店)으로 운영되다가 1962년 동방생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1963년 삼성이 동방생명을 인수한 후 신세계백화점으로 명칭을 바꿨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은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의 외형을 보존하고 있다.

미쓰이 재벌이 조선에 진출한 또다른 회사가 조선방직이다. 미쓰이물산은 서울에 경성지점을 열었고, 부산에 조선방직을 세웠다

 

미쓰이 로고 /위키피디아
미쓰이 로고 /위키피디아

 

미쓰이는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다른 일본 재벌들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군사적 팽창에 협력했다. 미쓰이는 1930~1940년대에 담배 자회사를 통해 아편 또는 헤로인을 섞은 담배를 제조해 만주에 대량을 팔아 이익을 남겼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을 주도한 일본 관동군 책임자는 후에 도쿄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미쓰이는 생산만 했다는 이유로 면책을 받았다.

미쓰이는 또 2차 대전 말기에 조선인과 미군 포로에 대한 강제노역을 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미군이 점령한 이후 미쓰이는 전범 기업으로 분류되어 미국 군정당국에 의해 해체 명령을 받았다. 산하 자회사의 주식은 일반에 매각되었다. 주력회사였던 미쓰이은행은 세계대전 중에 다른 은행에 흡수됐다가 1948년에 다시 독립했다.

미 군정이 끝나고 미쓰비시, 스미토모와 함께 미쓰이도 게이레츠(系列) 관계로 다시 결집했다. 물론 과거 재벌 시대만큼의 결집력은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계열사의 독자성이 강화되고, 실적을 중시하는 경영자들이 그룹의 방침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결합한 미쓰이는 계열사 사장단 모임인 니키회(二木會)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는 미쓰이물산, 미쓰이부동산, 미쓰이E&S 등 미츠이의 이름을 가진 회사 이외에 도요타 자동차, 도시바, 후지 필름, IHI, 도레이 등이 가맹하고 있다. 일본 최대은행인 스미토모미쓰이파이낸셜 그룹, 도쿄 중심가 니혼바시의 미쓰코시 백화점은 미쓰이 그룹이 건재함을 보여 준다.

 

도쿄 니혼바시의 미쓰이 타워 /위키피디아
도쿄 니혼바시의 미쓰이 타워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Wikipedia, 三野村利左衛門

Searching in History, Minomura Rizaemon and the Survival of Mitsui

Wikipedia, Mitsui

Wikipedia, Mitsuk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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