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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세계
시대를 너무 앞서간 당대 최대 철제증기선…바다의 수정궁에서 애물단지로
천재의 도전의식이 만든 실패작, 그레이트이스턴호
2019. 05. 22 by 김현민기자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 1806~1859)은 영국 산업혁명을 이끈 위대한 엔지니어다. 그는 영국의 대표적 상징물은 템스강 터널,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그레이트 브리튼호를 디자인하고 건설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는 브루넬은 대영제국의 철도 25개를 구축하고, 100개가 넘는 다리를 디자인했다.

1950년대에 그는 새로운 모험에 도전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자, 물위에 떠 있는 도시를 만들자.”

낮에는 장엄하고, 밤에는 어두운 수면에 불빛을 반사하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 승객 4,000명을 태우고 런던에서 시드니까지 한번도 석탄을 갈아 넣지 않는 힘차게 움직이는 동력선,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서 춤을 추거나 특별 제작된 등불이 비추는 갑판 위에 산책을 증기는 수정궁, 그런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말년에 육상교통에서 선박으로 옮겨졌다. 당시 증기선은 단거리 항해만 가능했다. 영국은 증기선이 석탄을 보급할수 있도록 세계 곳곳의 식민지에 저탄소를 건설했다. 부르넬은 석탄 보급 없이 대서양을 건너려면 연료를 많이 실을수 있는 대형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 배가 그레이트웨스턴(Great Western) 호였다. 이 배는 목재선박이었다. 1838년 그레이트웨스턴호는 영국 브리스톨에서 뉴욕까지 15일만에 주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브루넬의 두 번째 배는 1845년에 건조된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 호였다. 이 배는 세계 최초의 철제 증기선이었다. 그레이트브리튼호는 앞서 처녀 항해에서 앞서 건조된 그레이트웨스턴호의 절반인 7일만에 대서양을 건넜다.

 

브루넬이 상상한 그레이트 이스턴호 그림 /위키피디아
브루넬이 상상한 그레이트 이스턴호 그림 /위키피디아

 

그는 마지막이자 세 번째로 그레이트이스턴(Great Eastern) 호를 만들기로 했다. 당대 최대 선박보다 4배나 큰 배를 철제로 만들어 연료 보급 없이 세계일주를 한다는 야심을 꿈꾸었다.

그의 꿈을 수행하기로 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조선 기사였던 존 스콧 러셀(John Scott Russell)이었다. 건조 장소는 런던 테임스 강변 밀월(Millwall)의 조선소였다.

총톤수 18,914, 배수량 27,400톤이고, 8,300마력, 길이 211m였다. 6개의 마스트에 약 5,400의 돛을 달도록 설계되었다. 외륜과 스쿠루를 함께 가동할 때 속력은 시속 15km, 승객 정원은 4,000, 승무원 400명이었다. 선체는 10개의 구역으로 구분했고, 철로 된 외판과 내판으로 이중선체형으로 만들었다. 암초에 부딛쳐도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건조중인 그레이트이스턴호 /위키피디아
건조중인 그레이트이스턴호 /위키피디아

 

배는 건조 과정에서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 스콧 러셀이 파산 지경에 몰렸다. 채권자들이 몰려와 압류를 시도했지만, 브루넬은 배짱을 부렸다.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브루넬이 없으면 이 거대한 리바이어단이 움직일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채권자들이 한발 양보했다.

진수도 어려웠다. 배가 육상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템스 강까지 이동하려면 쇠사슬로 배를 묶어 배 밑바닥에 통나무를 깔아 굴려야 했다. 진수 과정에서 쇠사슬이 끊기고 배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몇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18591월에 시도된 진수작업은 그해 8월에야 마무리 되었다.

1859830일 시험항해에 들어갔다. 99일 템스강을 빠져 나와 영국해협으로 이동중일 대 갑자기 굴뚝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났다. 힘차게 뿜는 증기에 굴뚝이 파열한 것이다. 12명이 부상당했고, 5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1859년 첫 항해시 그레이트이스턴호의 굴뚝 폭발사고 /위키피디아
1859년 첫 항해시 그레이트이스턴호의 굴뚝 폭발사고 /위키피디아

 

이때 브루넬은 중병에 걸려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사고 소식을 들은 브루넬은 사고 6일후인 915일 숨을 거두었다. 비교적 젊은 53세의 나이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첫 항해도 못한채 다시 수리작업에 들어갔다.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리를 마친 거함은 18601월 다시 항해를 준비했는데, 선장 해리슨이 그레이트이스턴호를 승선하기 위해 보트로 이동하고 있었다. 갑자가 거센 돌풍이 불었다. 선장 해리슨이 보트의 돛을 올리라고 명령했지만 돛이 꿈쩍이지 않았다. 잠시 뒤 파도가 돛을 강타했고 보트는 뒤집히고 말았다. 브루넬이 선택한 첫 선장 해리슨과 그의 조수는 파도에 흽쓸려 저 세상으로 갔다.

1860년 드디어 그레이트이스턴호는 뉴욕으로 처녀 항해를 떠났다. 4,000명 정원의 거함에 승객은 38명에 불과했다. 선원수보다 적은 승객을 태운 이 배는 뉴욕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수천명의 구경꾼이 몰려와 배에 오르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거리는 구경꾼으로 찼고, 호텔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환희는 잠깐이었다. 1861400명의 승객을 태우고 리버풀로 떠난 배는 돌풍을 만났다. 좌현 외륜이 물에 잠겨 가동을 멈추었고, 스크루마저 작동되지 않았다. 키의 조정이 불가능했고, 배는 풍랑에 떠내려 갔다. 배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홀의 피아노는 산산조각 났고, 승객들은 죽을 힘을 다해 뭔가 단단한 것에 매달려 밤을 세웠다. 그 다음날엔 허리케인이 닥쳐왔다.

하지만 그 거칠던 바다가 갑자기 잔잔해지며 그레이트 이스턴호는 무사히 항구로 들어갔다.

1862년 여름까지 이 배는 정기적으로 뉴욕행 항해를 했다. 하지만 그해 8월 뉴욕 롱아일랜드를 지나면서 배 밑바닥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바깥쪽 외판 바닥에 길이 26m, 1.5m의 긴 틈이 벌어졌다.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암초에 배가 긁힌 것이다. 다행이 이중선체여서 침몰하지는 않았다. 브루넬의 설계가 배를 위기에서 건져 낸 셈이다.

또다시 수리에 들어가 186212월에 항해가 가능했지만, 선주가 수리비를 낼 돈이 없었다. 배는 돈을 벌기는커녕 돈을 먹는 하마였다. 50만 파운드 이상의 제작비가 든 거함은 25,000 파운드에 팔려 나갔다.

새로 배를 인수한 사람은 이 배를 여객선이 아니라 화물선으로 쓰기로 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을 놓는데 배가 투입되었다. 엄청난 양의 케이블을 싣고 천천히 대서양 바닥에 케이블을 까는 사업에는 성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케이블 설치작업에서도 이 배의 효용은 끝이 났다. 1874년 케이블 가설 전문선박인 페러데이호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그레이트 이스턴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수에즈 운하가 뚫렸지만, 이 배는 운하를 통과할수 없었다.

 

항해에 나선 그레이트이스턴호 /위키피디아
항해에 나선 그레이트이스턴호 /위키피디아

 

이제 배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12년째 밀퍼드헤이븐 항 받침대에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85년에 석탄운반업자가 26,000 달러에 인수해 전시업자에게 임대했다. 업자는 이 배를 순회전시용으로 쓰려고 했지만, 엔진은 녹이 슬었고, 스쿠루는 뻣뻣해 사용하기 난감했다. 고쳐 쓰자니 수리비가 더 들었다.

결국 사업자는 배를 리버풀로 이동시켜 놀이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중곡예사들이 로프 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연회실은 음악회장으로 사용되었다. 축제를 열기 위해 맥주홀이 만들어졌고, 마술사, 칼 던지는 사람들이 묘기를 부렸다.

마지막 배의 선주였던 루이 코헨은 고귀하게 태어난 배가 비천하게 사용되는데 마음이 아팠다. 그는 배를 차라리 부숴버리기로 하고 고철업자에게 팔았다. 1888년 그레이트이스턴호는 고작 16,000 파운드에 팔렸다. 건조하고, 수리하고, 유지하는데 100만 파운드 이상 들었던 배는 고철값 이하로 필려 나간 것이다.

철거업자들은 이 배를 철거하면 철판과 여러 금속에서 58,000 파운드의 가치가 나올 것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배가 워낙 탄탄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져 철거하는데만 200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2년이 걸렸다. 배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건조 중에 실종된 리벳공과 소년 조수의 해골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결국 철거업자도 손해를 보고 말았다. 그레이트이스턴호는 불운의 유령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배를 설계하고 건조한 브루넬은 영국에서 유명인이 되어 있다.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06년에 영국에선 브루넬 200’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그레이트이스턴의 실패는 오늘날 대형여객선의 모델이 되었다. 이 배가 당시에 대형선박이 기항할 조건이 갖추어진 항구가 드물었다. 그후 세계 유수의 항구들이 그 조건에 맞추어 새로 개축되었다. 이 배보다 긴 배가 출현하는데 11년이 걸렸다.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위키피디아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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