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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인 15일 국내 도착, 국민추도기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 안장
봉오동·청산리대첩 홍범도 장군, 조국의 품에
2021. 08. 12 by 박차영 기자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주역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유해가 고국의 품에 돌아온다.

청와대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광복절인 15일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대한민국에 도착한다고 밝혔다. 홍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추도기간을 거친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14,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한다. 특사단에는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과 국민대표 자격의 조진웅 배우가 참여한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홍범도장군의 묘 /국가보훈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홍범도장군의 묘 /국가보훈처

 

홍범도 장군은 1868827(음력)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타격을 줬다. 당시 일본군은 홍 장군을 체포하려고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가 그가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가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전후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3·1운동 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가 벌인 최초의 전투였다.

19206월에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9사단의 추격대대를 궤멸시켰고, 일본군은 157명 사망, 200여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보복에 나섰으나,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합세해 일본군을 무찌른 것이 청산리 전투다. 홍 장군은 일제강점기 최대 대첩으로 꼽히는 이 전투에서도 큰 몫을 담당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19211월 만주에서 다시 연해주로 옮겨갔으며, 그해 6'자유시 참변' 때 이르쿠츠크파 편에 섰다가 소련군의 일원이 됐다. 1922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김규식·여운형·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레닌을 접견하고 레닌 이름이 새겨진 권총 한 자루, 금화 100루블, '조선군 대장'이라고 쓴 레닌 친필 증명서 등을 받기도 했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193711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났다. 이듬해 4월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께 이곳으로 옮겨온 고려극장의 수위 등으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19431025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홍범도 장군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범도 장군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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