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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고려초 동해안 방비 허술한 틈타 경주까지 약탈…일본 규슈에도 침입
11세기 동해안 약탈한 동여진해적…우산국 멸망
2019. 05. 27 by 김현민기자

 

고려 초기에 함경도는 여진족의 땅이었다. 그곳에는 통일적인 정치가 형성되지 않았다. 11세기 전반기에 동여진 가운데 강한 부족들이 해적단을 구성해 고려의 동해안과 일본 규슈 지역을 침략해 약탈했다. 이른바 동여진 해적이다. 이들의 해적활동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던 울릉도의 우산국이 멸망했다.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보면, 현종 2(1011)에 동여진(東女眞)100여척의 배로 경주를 약탈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곧이어 고려 조정은 경북 영일(迎日)흥해(興海))울주(蔚州)장기(長鬐)에 성을 쌓았다.

경주는 고려시대에 동경(東京)으로, 개경(개성), 서경(평양)과 함께 3(三京)의 하나였다. 피해상황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

다만 동여진이 100여척의 배로 침입해 약탈했다면 그 규모는 가히 상상할수 있다. 1척에 쵝소 20여명이 탔다면, 2,000명 이상이 침입한 것이다. 이들은 경주 약탈에 이어 울릉도를 와 일본 쓰시마, 이키, 하카다를 침입했다. 따라서 동여진의 경주 침입은 동해안을 육로를 따라 온 것이 아니라 바닷길로 온 것이다. 즉 해적이었다.

일본에서는 동여진 해적을 도이(刀伊)라고 했다. 동이(東夷)를 그들 식으로 포기한게 아닌가 싶다.

 

동여진 해적 침공로 /김현민
동여진 해적 침공로 /김현민

 

동여진 해적의 동해안 침입은 고려초부터 12세기전반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현종조에는 이들이 일본 쓰시마, 규슈까지 침범한다.

첫 공격은 목종 8(1005)에 등주(登州)를 침입한 것이다. 등주는 동해안 북쪽에 위치한 강원도 안변인데, 당시 동계(東界) 소속 해안 기지였다. 여진은 이때부터 바닷길로 동해안을 침탈한 것으로 보인다. 동여진 해적들은 주진(州鎭)의 부락 30여곳을 불태웠고, 고려가 장수를 보내 겨우 막았다고 한다. 고려는 동북 지역이 여진의 약탈에 노출되자 동계 지역에 7개 성을 지어 대비했다.

다음 임금인 현종 연간(1009~1031)에 동북 해적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들은 더 남쪽으로 공격했다. 그 대상이 동부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경주였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여진 해적의 침입에 대비케 했고, 최대의 국방현안으로 인식했다. 동해안에 성을 쌓고 수군과 함대를 배치했다.

현종 2년에 이어 3(1012)에도 동여진은 경주 인근의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에 침입했다. 고려는 문연(文演)강민첨(姜民瞻)이인택(李仁澤)조자기(曹子奇)등의 장군을 보내 여진족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이들의 약탈이 준 피해는 기록되지 않아 알 길이 없지만, 그해 고려는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고 그 재목으로 황룡사의 탑을 수리했다고 한다. 임금의 별궁을 뜯어서라도 호국신앙의 상징인 불교에 의지할 만큼 절박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11세기 100년간 고려를 침입, 약탈한 동여진 해적은 어떤 존재인가.

여진족 /위키피디아
여진족 /위키피디아

 

고려와 일본을 약탈한 동여진 해적의 존재는 포로모타부(蒲盧毛朶部)의 여진집단들이라고 한다. 포로모타부는 한반도 동북해안지대와 두만강 중하류 유역,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포시엣만 연안 지역등에 거주했던 여진족들을 지칭한다.

당시 포로모타부의 여진 부족들은 통일적인 정치체를 구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침략 규모나 주체도 시기별로 차이가 드러났다. 포로모타부의 세력이 가장 확대되었넌 11세기 전반기에 동여진 해적의 활동이 가장 극심했으며, 1030년대 이후 여진부족들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자 해적 활동은 소규모화되어 위축되었다. 1050년 전후 한때 포로모타부와 거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동여진 해적의 침입이 증가하기도 했지만, 11세기 후반에는 고려가 공세를 벌여 동여진 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력을 강화하자, 통여진 해적의 침략이 현저하게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정요근, 11세기 동여진 해적의 실체와 그 침략 추이)

 

동여진의 경주 공격은 고려의 방어로 실패한 듯하다. 그들은 공격 목표를 울릉도(우산국)과 일본으로 바꾸었다.

현종 9(1018)에 우산국(于山國)이 동북 여진의 공격을 받아 농사를 망쳤고, 이에 고려는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농기구를 보내야 할 정도로 여진 해적에 의해 울릉도가 약탈당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울릉도는 고려에 조공을 하며 우산국이라는 독자적 왕국 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더 이상 우산국이라는 명칭이 역사의 무대에서 등장하지 않고 사라진다.

1032(덕종 원년)에 우릉성주(羽陵城主)가 그의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고려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우릉성으로 격하되어 고려에 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릉성주 아들의 이름이 고려어가 아닌 것으로 보여, 아마도 우산국 왕실을 성주로 남겨둔 것 같다.

512년 신라 이사부 장군의 정벌 이후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했지만, 독립적 정치체제로서의 존재는 유지했었다. 고려사에서 우산국이란 명칭이 자주 나타난다. 하지만 여진 해적의 침입으로 우산국이 마지막 남은 국체도 잃게 되면서 멸망했다. (김호동, 이사부 우산국 복속의 역사적 의미)

이때 여진 해적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고려는 감창사, 안무사, 작목사 등의 관리를 울릉도에 수시로 파견해 관리하고, 울진현에 귀속시켜 고려의 영토로 직접 관리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올릉도에 대해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 해적 침입 이전에 울릉도에는 촌락도 있고, 절도 있었던 것 같다. 이랬던 울릉도가 해적으 약탈로 황폐화되고, 사람들이 거주를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울릉 남서 고분군 /울릉군
울릉 남서 고분군 /울릉군

 

11세기 동여진이 동해 일대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며 설친 것은 고려가 동해안을 허술하게 경비한 탓도 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주 병력을 서부에 배치했고, 건국 이후에도 거란, 송과의 관계에서 서해안과 서경(평양)을 중시했다. 10세기 이래 동해는 동계를 설치했지만, 군사력에서 힘의 공백 상태가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동여진의 통제되지 않는 부족이 고려의 빈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약탈한 것이다.

하지만 동여진 해적의 세력 확대에 고려는 심각하게 대처했다. 고려는 동해안의 요충지에 성곽을 축조하여 방어체계를 강화하고, 해적을 물리치기 위해 수군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목종에 이은 현종도 동해안 일대에 성을 쌓았고, 동해안 수군을 관할하는 기구인 진명도부서를 설치하였다.

고려의 이같은 동해안 방어체계 강화는 해적들을 점차 동해안 진입을 차단하게 되었다. 목종, 현종의 적극적인 대처로 수시로 침범하는 동여진 해적 방어에 임시적 조치가 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다음세기인 1107년 고려 예종은 윤관(尹瓘)에게 17만 대군을 주어 함흥 이북의 동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이후 동여진 해적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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