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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일본 규슈에서 20여일간 약탈과 방화, 살인, 납치…퇴각하면서 한반도 습격
동여진 도이(刀伊)의 1019년 일본 습격
2019. 05. 28 by 김현민기자

 

한반도 동해안을 약탈하던 동여진 해적들이 고려의 무장 대응이 강화되자, 일본으로 쳐들어갔다. 1019년 간닌(寛仁) 3327(이하 음력)부터 4월 중순까지 20여일간이다. 동여진 해적들은 쓰시마(對馬)와 이키(壱岐), 지쿠젠(筑前)을 휩쓸며 수백명을 죽이고 1천명 이상 납치해 돌아가다가 한반도 남해안에 상륙했다. 일본 기록에는 이 사건을 도이의 입구’(刀伊入寇), 즉 동여진 해적의 침략과 약탈이라고 표현한다.

도이(刀伊)는 원래 고려인들이 동쪽의 이적(夷狄), 즉 동이(東夷)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일본인들이 고려인들의 표기를 따라서 쓴 용어라고 한다.

일본 기록을 살펴보면, 이해 동여진 해적들은 한반도 동해안을 훑으면서 고려인들을 납치했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을 쳐들어갔다. 일본에서 퇴각하면서 다시 한반도 남해안을 습격했다고 고려에 의해 다시 퇴각한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쓰시마 습격

1019327(양력 510) 50척의 해적선이 쓰시마를 습격했다. 일본인들은 해적 규모를 3,000명 정도로 보았는데, 과장인 것 같다. 배 한척에 20명씩 타면 1,000명쯤 될 것이다. 그 규모는 이들이 8년 전인 1011년 경주를 습격했을 때 100척에 비해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해적 선단은 쓰시마 섬에 상륙해 곳곳에서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 쓰시마 태수 후지와라노 도하루(藤原遠晴)는 대항은커녕 겨우 섬을 탈출해 규수지역 총사령관이 주둔하는 다자이후(太宰府)로 달아났다.

해적들의 약탈로 당시 유명하던 쓰시마 은광산이 불탔고, 36명이 피살되고, 346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해적들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남자보다 여자와 아이들을 더 많이 끌고 갔다.

 

이키 공격

해적들은 쓰시마에서 남하해 이키 섬을 습격했다. 노인과 아이는 살해되고, 성인 남녀는 배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잡아 먹었다.

이키 태수 후지와라노 마사타다(藤原理忠)가 급보를 전해듣고 147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대항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키 태수는 전투 중에 전사했다.

해적들은 국가사찰(國分寺)인 도분지(嶋分寺)를 불태우려 했다. 이에 이키 섬 승려 총책임자인 소가쿠(常覚)가 승려나 현지 주민들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해 세 차례나 해적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해적들의 맹렬한 공격에 도분지는 끝내 점거되었다. 소가쿠는 죽기 직전에 한 사람을 섬에서 탈출시켜, 규슈의 다자이후에 보고하게 했다. 도분지의 승려들은 전원 사살당했고, 절은 불타 버렸다.

이키에서는 태수를 포함해 남자 44, 승려 16, 아이 29, 여자 59명으로 모두 148명이 학살당했다. 또 여성 239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키에 남은 사람은 모두 35명뿐이었다고 한다.

 

지쿠젠 상륙하카다에서 저지

48일부터 12일가지 해적들은 지쿠젠(筑前)에 상륙해 이토(怡土), 시마(志麻), 사와라(早良)를 습격하고 규슈 본영 태재부가 있는 하카타(博多)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상륙초기에 날씨가 좋지 않아 해적들의 진격이 지체되었다.

그 틈에 태재부의 총사령관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가 호족과 무사단을 소집해 인솔할 시간을 얻었다. 태재부의 군대는 하카다에서 해적들을 격퇴하고 규슈 상륙을 저지했다. 후지와라는 문신이었는데, 눈병 치료를 위해 태재부로 내려 와 있다가 총지휘관으로 해적을 퇴치함으로써 후에 명성을 안게 되었다.

 

하카타 상륙에 실패한 해적들은 413일 비젠(肥前)의 마쓰라(松浦)을 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해적들은 북상해 쓰시마를 공격한 다음 한반도로 퇴각했다.

전체적으로 도이들의 습격에 의한 일본의 피해를 보면, 피살 365, 납치 1,289명의 인명피해를 냈고, 소와 말이 380, 가옥 45동 이상이 손실을 입었다는 일본의 기록이다.

 

고려 연안 습격

동여진 해적들이 일본을 습격한 후 한반도 남해안에 상륙해 약탈과 납치를 자행했다는 사실이 일본 기록에 남아있다.

일본 대신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実資)가 남긴 <소우기>(小右記)라는 일기에 당시 해적에게 납치되어 조선에 끌려간 일본인들의 얘기가 자세히 적혀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여진 해적은 고려 연안에서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상륙해 약탈을 벌였고, 남녀를 붙잡아서 건강한 사람만 솎아내고 노약자는 때려 죽이고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곧이어 고려 수군은 방어에 나서 해적들을 격퇴했고, 이때 납치되었던 일본인 약 300명을 구출해 김해부(金海府)에서 보호했다는 것이다. 고려군에 의해 구출된 内蔵石女多治比阿古見라는 일본 여인은 고려 김해부(金海府)에서 흰 모시로 지은 옷을 지급받았고, 은그릇으로 담은 식사를 지급받는 등 후대를 받고 귀국했다. 고려측은 여진 해적에 납치되었던 일본인 포로들을 모두 송환했다.

이 스토리는 <고려사><고려사절요>에도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진명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部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선 8척을 나포했는데, 해적들이 강탈했던 일본인 남녀 259명은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을 시켜 일본으로 돌려보내도록 조치했다. (고려사 현종 104)

 

50여척이 일본을 습격했다가 고려에 의해 8척이 나포되었다면, 나머지는 도중에 격침되었거나 도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적의 정체도 몰랐던 일본

일본은 고려측의 환대에도 겁에 질려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다. <소우기>도이의 공격이 고려의 짓이 아니라고 판단되나 신라는 우리의 적이었고, (고려가) 국호를 바꾸었다고 하나 그 야심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설령 포로들을 보내 주어도 기뻐할 일은 아니다.”고 적었다.

도이 해적들에 납치되어 끌려갔던 나가미네노 모로치카(長嶺諸近)라는 일본인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해적에게 붙들려 있는 가족의 안부를 염려해 고려를 거쳐 도이들의 땅까지 들어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고려인 통역 인례(仁禮)로부터 고려가 도이(刀伊)라 불리는 족속들과 해상에서 전쟁을 벌였고, 그들을 격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전함 1,000 척을 준비해 대비하고 있다가 다시 쳐들어 온 이들 도이 해적을 쳐부수고 이들이 포로로 잡고 있던 일본인들을 구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가미네 가족은 백모를 제외하고 모두 바다에 던져져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본은 처음에 해적의 정체가 파악하지 못했다. 처음에 해적을 격퇴했을 때 포로로 잡은 사람이 대부분 고려인이었고, 고려인들이 우리는 도이들에게 잡혀 왔다고 대답했지만, 일본인들은 신라, 고려에 대한 구원으로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가미네의 귀국후 보고로 일본인들은 해적의 정체가 고려인이 아니라 도이(刀伊)라 족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9월에 고려의 정자량이 인솔하는 사신단이 납치된 일본인들을 인솔해 오면서 오해를 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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