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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장사성·방국진 반원 운동에 뿌리…주원장 패권 장악후 해적으로 전환
중국해적, 명(明) 해금정책에 왜구와 결탁
2019. 05. 29 by 김현민기자

 

중국에는 오랫동안 해적이 있었다. 중국사에는 서기 109년 후한시대에 해적 장백로(張伯路) 3,000여 명이 붉은 두건에 붉은 옷(紅衣)를 입고 해변을 휩쓸었다고 했고, <삼국지> 오지(吳志)에도 해적 기록이 나온다.

본격적으로 해적이 등장하는 시기는 몽골 지배 시기부터였다.

원 세조(世祖) 쿠발리아 재위 때에 해적 하문달(賀文達)이 노략질한 부녀자 130여 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해적들은 재물은 물론 사람도 납치해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 왕조는 1292~1293년 사이에 수군 2~3만명을 이끌고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공격했다가 실패했는데, 그 이후 수군들이 푸젠(福建), 광둥(廣東) 일대에 뿔뿔히 흩어졌다. 이들중 일부가 원 말기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해적이 되었다. 해적들은 작은 정크선을 이용해 바다와 강을 누비며 약탈행위를 했다. 그들은 주로 강 어귀에 요새를 만들었으며, 전투를 위해 보병도 모집했다.

 

원 말기 반란지역 /地球歷史館(일본)
원 말기 반란지역 /地球歷史館(일본)

 

이런 해적들을 규합해 반원(反元) 운동을 일으킨 해상세력이 장쑤(江蘇) 출신의 장사성(張士誠)과 저장(折江) 출신의 방국진(方國珍)이었다.

장사성은 남북교통의 중심지인 대운하를 점거해 원나라의 식량운반을 차단시켰고, 방국진은 저장성 연근해를 근거지로 몽골 왕조의 조세 징수선을 탈취했다. 이때 원 왕조는 주원장(朱元璋) 등 내륙에서 봉기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바다의 반란군을 제어할 여력이 없었다.

장사성의 본명은 소금을 운반하던 뱃사람 출신이었다. 소금 맡은 관리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353년에 동생들과 소금장사치 등 18명을 규합해 원나라에 맞서 거병했다. 그의 군대는 곧 양쯔 강의 주요 거점들을 차지했다. 이듬해 대주(大周)라는 나라를 참칭하고, 스스로 성왕(誠王)에 올랐다. 원나라는 고려군까지 모아 80만명의 대군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장사성 일파의 완강한 저항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다가 사태가 위험하자 1358년에 원나라에 투항해 태위(太尉)의 자리를 얻어 해상군벌로 남았다. 그는 병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군량 10만석을 원의 수도 대도(大都, 베이징)까지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363년엔 스스로 오왕(吳王)이라 칭하고 다시 원나라에 맞섰다.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도 장사성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

장사성은 주원장의 세력과는 교전을 피하면서 고기잡이와 소금의 이익을 통해 교역하며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 이때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기도 했다. 1366년 주원장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면서 장사성 패거리를 공격했고, 이듬해 포로로 잡혀 효수되었다.

방국진도 몽골에 저항한 해적이었다. 그도 소금장사로 해운업을 운영하다가 1318년에 해적 활동에 나섰다. 힘이 강할 때는 원나라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힘이 약할 때에는 귀순하는 등 시류의 흐름에 빠른 변신을 했다. 변신에 빨랐다. 귀순과 저항을 반복하다가 원에서 높은 벼슬을 받았는데, 고려사에서는 그를 명주사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지막에 원나라가 주원장의 명()에 의해 쫓겨나자 명의 주원장에게도 저항과 귀순을 되풀이하다가 1367년에 명의 공격으로 항복했다.

장사성과 방국진의 부하들 중에는 물길에 익숙하고 해전에 단련된 어부 출신들이 많았다. 원 왕조가 대운하의 통행을 유지해야 세수를 확보할수 있었기 때문에 두 해적의 투항에 공을 들였다. 거액의 포상금과 높은 관직을 내걸었고, 둘은 형세가 불리하면 귀순하고, 유리하면 다시 일어나 옛 거점을 차지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장사성은 전성기에 지배영역이 2,000리나 되었다고 한다.

주원장이 중국의 패자가 되면서 두 해양세력은 차례차례 패망했다. 하지만 잔당들은 바다로 도망쳐 수시로 출몰하는 해적이 되었다. 문제는 이들 중국해적이 신흥 명나라에만 반역한 게 아니라, 일본 왜구(倭寇)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방국진 동상 /바이두백과
장사성 동상 /바이두백과

 

중국 대륙에 왜구가 들이닥친 것은 일본 남쪽 규슈와 중국 서부 해안을 연결하는 직항로가 발견된 것이 계가가 되었다. 그 이전에 일본의 조공사절단은 한반도와 요동반도의 해변을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러던 것이 송()대 어느 시절부터 계절풍을 이용해 일본와 중국을 잇는 항로가 발견되었다.

일본~중국 직항로를 이용하면서 시간도, 거리도 단축되는 바람에 두 나라 사이에 해상교통과 무역이 크게 번성했다. 좋은 일에는 마()도 끼이는 법이다. 해적들이 이 항로를 이용해 중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15세기에 일본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가면서 일본 해변에 독자세력화한 왜구와 상인들이 대거 중국해역에 몰려들었다. 중국은 해안선이 길고 리아시스식 해안이 많어 아 중국 해적의 소굴이 많았는데, 이들은 왜구와 손을 잡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는 권력을 잡은 자만이 사용하는 게 아니다. 쫓기는 세력도 적의 적을 활용한 셈이다.

 

중원을 장악한 주원장은 장사성·방국진의 잔당 뿐아니라 왜구도 고민거리였다. 일본을 무력으로 정벌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앞의 원 왕조가 고려와 합동으로 두 번이나 왜를 정벌하려다 실패한 경험도 있어 외교로 푸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주원장은 왜에 사신을 보내 침략행위를 중단하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왜왕은 주원장에게 성의가 없는 답변을 늘어 놓았다. 아마도 왜의 조정이 자기네 해적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채택한 방법이 악수(惡手)였다. 바닷가를 비우는 해금(海禁)정책이 취해졌다. 솥이 뜨거워지면 불길의 원인인 아궁이의 장작을 끄집어 내는 방식이다. 백성들에게 바다를 나가지 못하게 하면 해적들의 약탈·납치 대상을 원천 봉쇄할 것이란 생각이었다.

명나라의 해금령은 태조 주원장 때부터 시작되었다. 후에 명 성조 주체가 정화에게 대형 함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까지 원정토록 한 이후에 해금령을 내려 해안경계를 강화했지만, 그 이전에 명나라는 건국초기에 해상세력에게 데었기 때문에 바다를 금지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원장이 백성들에게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시키자, 바다에서 생활하고 이익을 얻는 섬 사람, 어민, 무역종사자들의 생계가 어려워 졌다. 명은 이들을 모아 10만의 병력을 꾸려 봉급을 주어 생활에 보태게 했다. 그러나 바닷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생계를 잇지 못했다.

 

초기의 해금령은 느슨했다. 무역을 금했지만 세관의 일종인 시박사(市舶司)를 두어 왜와의 무역에 숨통을 열어 주었다. 그러다 1523년 닝보(寧波)에서 일본 조공사절단 간에 폭력사건이 나면서 명나라는 시박사 폐지라는 최악수를 두었다. 그나마 시박사를 통한 무역마저 중단되자, ~왜 간의 무역은 폭력화했다. 왜의 상인들은 밀무역으로 물건을 먼저 주는 외상거래를 했고, 명나라 상인들은 정부의 통제조치로 소득이 줄자 밀린 돈을 떼어먹는 일이 발생했다. 돈을 받으려는 왜 상인들이 명나라 중간 상인을 살해하고 달아났고, 왜구는 점차 폭력화되어 갔다. 명은 해안 통제를 더욱 강화해 돛을 두 개 이상 단 선박을 건조해 개인이 소유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명 관리들의 패악이 심해지면서 해안가 백성들은 왜구를 따르는 현상이 빚어졌다. 푸젠, 장쑤, 저장, 광둥성 해안의 주민들은 외국인()들과 통상하도록 길을 안내하고, 그러다 들키면 도적이 되었다. 조정이 색출해 죽이려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겨나는 것이 해적이었고, 그들중 지도자가 생겼으니, 오봉선주(五峰船主) 왕직(王直)이었다.

왜구 격퇴에 앞장선 명나라 관리 담륜(譚綸)(, 푸젠) 사람은 해변에 거주해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을수 없었다. 외국과의 교류가 엄격하게 금지된 이후 물고기 장사가 막혔기 때문에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도적이 더욱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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