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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중국, 해금령으로 스스로 발 묶어…디우 해전 이후 유럽의 아시아 패권 시작
16세기, 유럽인 진출에 아시아 충격
2019. 06. 03 by 김현민 기자

 

대항해 시대 이전에도 세계를 여행하려는 인류의 욕망은 끊임 없었다.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1260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해 중앙아시아, 중국 원()나라에 들러 3년간 머물면서 쿠빌라이 조정을 방문하고 해로를 거쳐 1269년에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은 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에 동기를 부여한다.

모로코인 이븐 바투타(Ibn Battuta)1325, 21세의 나이에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난 후 무려 25년이나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는 중국 광저우(廣州)와 항저우(杭州)를 방문했으며,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그의 여행기도 남아 있다.

이븐 바투타와 시슷한 시기에 중국인도 세계 여행에 나섰다. 중국 원나라 시절에 왕대연(汪大淵)이란 사람은 2차례에 7년간에 걸쳐 해외 탐방에 나섰다. 1330, 왕대연은 상선을 타고 푸젠(福建)성 취안저우(泉州)에서 출발해 하이난섬, 점성(占城, 베트남 남부), 수마트라, 믈라카, 미얀마,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이집트, 소말리아, 필리핀을 다녀갔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남양군도, 홍해, 지중해, 모잠비크,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돌아왔다. 그도 여행기로 <도이지략>(島夷志略)을 남겼다.

왕대연의 여행기가 70년후 정화(鄭和)의 해외원정에 도움을 주었다는 자료나 증거가 없다. 다만 개인적인 호기심의 차원에서 해외를 여행하고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다.

정화는 명() 황제의 지시를 받아 1405년에 62척의 함대에 27,000명의 선원을 내우고 난징(南京)을 출발했다. 참파, 자바, 팔렘방, 믈라카, 실론, 캘리컷 등지를 방문해 중국 황제의 위세를 과시하고 조공을 요구했다. 거절하는 나라는 군사력으로 토벌했다. 정화는 그후 1433년까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원정을 단행했다. 중국인들은 정화의 원정을 컬럼버스보다 앞선 것이라고 치켜 올리고 있다.

하지만 정화 원정 이후 중국은 선박을 폐기하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이른바 해금령(海禁令)을 단행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명조가 정화 이후에도 함대를 유지하고 해외원정을 계속했더라면 세계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내세운다. 하지만 명나라는 당시 몽골이 재기하고, 왜구가 발호하는, 즉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외환에 시달렸다. 해외에 나갈 여력이 없었다. 역사는 그때 상황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지, 호사가들의 상상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는다.

 

정화의 해외원정로 /위키피디아
정화의 해외원정로 /위키피디아

 

결국, 유럽인에 의해 대항해 시대가 열린다.

서양인들 또는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인 후예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를 신대륙의 개척자라고 추앙한다. 미국에선 10월 두 번째 월요일을 컬럼버스 데이로 정해 기념한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그는 잔인한 살육자요, 정복자에 불과했다.

149283일 저녁 콜럼버스는 산타 마리아(Santa María)호 등 3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 남쪽 팔로스(Palos de la Frontera)항을 떠났다. 나머지 두 배는 핀타(Pinta)호와 산타 클라라(Santa Clara)호였다.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떠나는 이 항해에는 모두 90명이 탔다. 선원은 물론 의사, 목수, 은세공사, 스페인 황실 사절, 아랍어 통역사등이 모였다.

컬럼버스는 앞서 13세기 이탈리아 상인이자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밑줄을 그어 가며 탐독하고 몽골 제국의 칸을 만날 생각을 했다. 그의 항해일지에서 이제 그레이트 칸을 만날 것이라는 구절이 많이 보이는데,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중국으로 착각한 것이다.

14921012일 새벽에 드디어 육지가 나타났다. 핀타 호에 타고 있던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라고 외친 순간, 세계사는 바뀌었다.

그는 그곳이 인도나 일본이 있는 동양의 어느 곳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이 나타나자 컬럼버스는 인도 사람인줄 알고 인디오라고 불렀고 그곳을 중국 해변이라고 믿으면서 <동방견문록>그레이트 칸과 금은보화를 찾으러 돌아 다녔다. 그가 도착한 곳은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의 과나하니 섬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그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했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마치고 그해 12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가져간 금제품이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그후 콜럼버스는 2, 3, 4차 항해를 떠났고, 1506년 죽을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다.

콜럼버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그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상식 중의 상식이 되어 있다. 그의 아메리카 대록 발견을 통해 갓 탄생한 스페인이 패권국이 되고, 유럽에 의한 세계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대륙의 발견은 원주민들에겐 재앙의 시작이었다. 서양의 사탄이 몰려온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범선 /위키피디아
대항해시대의 범선 /위키피디아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지 5년후인 1497, 포르투갈의 해양탐험가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4척의 선대에 170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컬리컷(Calicut)과 고아(Goa)를 발견하고 되돌아 갔다.

그는 1502년에 20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인도에 건너와 이슬람 순례자를 태운 아시아의 선박을 포획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수백명을 배 안에 태운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는 캘리컷의 술탄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포격했다. 다가마의 선원들은 물건을 팔러온 인도 상인들을 매달아 죽이고 사지를 잘랐다. 그러고도 모자라 사지를 잘라 술탄에게 보내 먹으라고 조롱했다.

포르투갈인들의 만행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이슬람 지도자들은 더 이상 기독교도들이 아시아의 바다를 넘나들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묵과할수 없었다. 경쟁 관계에 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과 이집트의 맘루크가 모처럼 단합하기로 결의했고, 인도의 구자라트와 캘리컷의 술탄도 연합군을 형성했다.

 

150923일 디우 해상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디우는 인도산 향신료의 수출항이었다. 포르투갈로서는 이 항구를 차지해야 동방 무역에서 큰 이익을 얻을수 있었다.

디우 전투(battle of Diu)는 인도양을 두고 동양과 서양의 해양 패권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인구 100만명의 포르투갈이 동양의 패자 오스만투르크를 제치고 인도양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서양세력이 동양에 진출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되었다.

디우항 앞바다의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전투의 성패를 결정한 것은 전함 수와 병력 수가 아니라, 무기였다.

포르투갈 전함에는 무거운 장거리 대포가 탑재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이슬람 선박은 노를 사용했고, 노를 젖는데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이슬람측도 총포가 있었지만, 포르투갈의 장거리 대포에는 무기력했다. 이슬람측은 배를 접근해 숫적 우위에 있는 병력을 적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작전을 폈다. 이에 비해 포르투갈 전함은 배가 접근하기도 전에 대포로 이슬람의 다우선에 포격을 가해 파괴시켰다. 이 무렵 서유럽에서는 전함에서 대포를 발사할 때 엄청난 반동을 흡수하는 기법을 습득했다. 대항해 시대 초기에 서양 선박들은 180m까지 정확하게 포격할수 있었다.

이 전투 후에 인도양의 패권은 동양의 이슬람 국가에서 서양의 기독교국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1510년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함락하고, 1511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1515,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와 실론 섬을 장악한데 이어 1516년에는 태평양으로 이동해 중국 광둥성의 주강(珠江) 입구에 도달한다. 포르투갈은 곧이어 마카우, 일본 나가사키로 진출한다.

 

대항해 시대의 탐험 경로 /위키피디아
대항해 시대의 탐험 경로 /위키피디아

 

곧이어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1519년 스페인 국왕의 지원을 얻어 미지의 탐험에 나섰다. 그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역의 방향의 세계일주을 감행해 1521316일 마침내 아시아의 필리핀 섬에 도착했다.

동에서 온 포르투갈 함대와 서에서 온 스페인 함대가 1520년대초에 아시아에서 마주친 것이다. 아시아는 이제 서양이라는 큰 오랑캐의 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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