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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우르다네타, 필리핀~멕시코 항로 발견…스페인-포르투갈, 막대한 삼각무역 이익
스페인, 태평양 무역로 개척…남미 은, 중국 유입
2019. 06. 04 by 김현민 기자

 

16세기 전반기에만 해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약속한 토르테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에 의해 동아시아에 먼저 도착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스페인은 이 조약의 눈치를 보느라, 아시아로 진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가 꾀를 낸 것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 아시아로 방법이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사이에 거대한 바다가 놓여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위험을 페라디난드 마젤란이 감수하며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에 도착했다.

마젤란의 태평양 횡단을 계기로 스페인은 아시아에 눈을 떴다. 스페인은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ś)에 의해 정복된 멕시코 식민지에서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를 진출하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스페인의 필리핀 첫 정착은 1543년에 이뤄졌다. 당시 멕시코는 뉴스페인 총독령이었는데, 그곳에서 출발한 탐험대가 필리핀에 도착했다. 초기 도착자들은 일부 필리핀에 남았지만, 식민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식민은 1565년 미구엘 로페즈(Miguel López de Legazpi)를 대장으로 하는 원정대가 멕시코를 출발해 필리핀에 도착하면서 부터였다. 이들은 필리핀 세부(Cebu)에 정착촌을 세우고 교회를 지었다.

이들 속에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Andrés de Urdaneta)라는 항해와 탐험에 중독된 자가 있었다. 그는 필리핀 총독으로부터 멕시코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동안 스페인은 마젤란과 그 일행이 그린 항해로를 따라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었지만, 멕시코로 돌아가는 길은 모르고 있었다.

우루다네타는 태평양에도 대서양과 마친가지로 무역풍이 고리를 형성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범선이 대서양을 건널 때 바람을 타고 도는 볼타 도 마르’(Volta do mar)라는 큰 호를 그리는 항로가 이용되었다. 우루다네타는 태평양 북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가는 무역풍을 만나 북미 서해안에 도착할 것으로 상상했다. 그래서 그는 북위 38°까지 북동쪽으로 가서 거기에서 동쪽으로 진로를 택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지금의 캘리포니아의 멘도시노 곶 부근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아카풀코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1565년 우르타네타가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함에 따라 필리핀~멕시코 사이의 교역로를 형성되었다. 여기에 멕시코에서 본국 스페인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연결함으로써 스페인은 포르투갈과는 반대편 방향에서 아시아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우르다네타가 발견한 마닐라~아카풀코 항로 /위키피디아
우르다네타가 발견한 마닐라~아카풀코 항로 /위키피디아

 

이후 마닐라와 아카풀코를 오가는 무역로를 우르타네타 루트(Urdaneta's route)라고 하는데, 마닐라 갤리온(Manila galleon)이라는 스페인의 무역선이 1년 내지 2년 간격으로 왕래하며 19세기초까지 이어졌다.

태평양 무역로가 개척된 첫해에 아시아 이민자들이 멕시코로 건너갔고, 그후 수천명이 이 길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서 조선술과 요새 축조, 공공건설사업에 참여했다. 17세기에 멕시코의 아시아 이민지 수는 이미 5~10만명에 달했고, 이들을 중국인이라는 의미로 치노스(Chinos)라 불리웠다. 멕시코 시티에 아메리카 최초의 차이나 타운이 만들어 졌다.

 

마닐라 멕시코 광장에 있는 마닐라-아칼풀코 갤리온 무역 기념물 /위키피디아
마닐라 멕시코 광장에 있는 마닐라-아칼풀코 갤리온 무역 기념물 /위키피디아

 

스페인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에 오기 앞서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도 아시아에 거점을 형성했다.

포르투갈은 1510년 언도 고아(Goa)에 거점을 만든데 이어 1511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에 진출한 다음, 중국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남지나해 해안을 어슬렁거렸다.

명나라 10대 정덕제(正德帝) 때인 1517년 포르투갈 정부가 난징에 사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포르투갈 배가 중국 해안에서 못된 짓을 하고 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말라카의 술탄이 명나라에 포르투갈 세력을 쫓아내 달라고 병력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꾀를 냈다. 중국 남해안에 발호하고 있는 해적들을 물리쳐 줄 터이니, 기항지를 한곳 달라고 했다. 이에 명나라 조정도 임대료를 내는 조건으로 마카오에 기항지와 거주지를 내주게 된다.

1557년 포르투갈은 명나라에 영구거주 조건으로 500 태일(, 37.7g)의 은(18.9 kg)을 임대료 조로 내는 조건으로 마카우 임대 계약을 맺는다.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 시대에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거점으로 남게 된다. 명과 청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왜구(일본)의 해안선 접근을 막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통해 중국과의 교역을 독점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무역로 /위키피디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무역로 /위키피디아

 

마닐라와 마카오에 거점을 만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본격적인 무역 경쟁에 나섰다. 대상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주요 거래방식은 금, , 도자기 등의 중계무역이었다.

스페인은 은() 거래에 참여했다. 스페인은 남미 포토시(Potosi, 볼리비아) 등지에서 생산된 은을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팔았다. 스페인은 중국과의 은 거래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6세기 후반에 중국이 수입한 은의 절반은 스페인, 나머지 절반은 일본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금과 은이 112.5의 교환비율로 거래됐다. 그들은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천문학에서 찾았다. 그들에겐 금은 태양이요, 은은 달이었다. 수메르 천문학에선 1년에 달이 태양을 도는 비율을 112.5로 계산했다. 112.5의 비율을 금과 은의 교환비율로 정했다. 수메르인의 전통은 로마제국에도 이어져 금과 은의 비율이 112.5 또는 113을 유지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선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6이었다. 중국에서 은 값이 비싼 것은 세금을 은으로 받아 은의 수요가 컸던 탓도 있었다. 명나라는 북방(몽골)과 끊임 없이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국내산으로는 은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해외에서 수입이 절실했다.

 

여기서 엄청난 이문이 발생한다. , 유럽인들이 일본 또는 남미 볼리비아에서 생산된 은을 가져와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면 100%의 환차익을 얻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해외에서 싼 은을 구해 중국에서 금으로 교환하고, 그 금으로 일본에서 은으로 바꾸고, 인도에서 면직, 말레카에서 후추를 사서 유럽으로 가져가면 엄청난 무역차액을 얻었다. 이른바 재정거래(arbitrage)에 의한 삼각무역이다.

동아시아 무역은 일본 왜구와 중국 사이의 밀무역, 새롭게 진출하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인들의 삼각무역이 경합하며 급성장했다.

중국의 최대 수출품은 생사(生絲)였다. 생사(raw silk)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가공하지 않은 실을 말한다. 생사는 주로 농민들의 부업에서 생산됐고, 최대생산지는 양쯔강(長江) 이남의 강남 델타지역이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된 생사를 호사(湖絲)라고 불리며 수출됐다. 생사산업은 벼농사와 비교하면 높은 수입을 얻을수 있었다. 또 많은 토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난한 중국 농민들은 생사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전세계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 명나라는 당시 가장 부유한 문명국이었다. 중국인들은 서양에서 가져온 물건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유럽인들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에 탐을 냈다. 이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선 은을 가져와야 했다. 스페인이 해외(남미)에서 개발한 은의 절반이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 와중에 유럽인들은 국내외 환차익을 활용한 투기적 행태를 보이며 무역이득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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