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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싸움에 휩쓸려 오랫동안 귀양살이…제자에게 세한도 보내며 심경 그려
추위에 돋보이는 세한도와 같은 김정희의 삶
2021. 12. 27 by 박차영 기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政喜, 1786~1856)는 우리나라 4대 명필의 하나로 꼽힌다. 그의 글씨는 청나라 학예인들의 칭송을 받았고, 그의 학문은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최고의 석학이었다. 김정희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가장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은 일본 동양철학자로 경성제국대 교수를 지낸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였다. 그는 추사는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라고 했다.

추사체는 개성적인 글씨체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시와 문장, 학문에서 대성했다. 추사는 살아서 자신의 글을 책으로 펴낸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은 후 10년이 되어 제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을 모아 문집으로 간행했다.

 

김정희는 1786(정조 10) 63일 충청도 예산 용궁리의 오늘날 추사고택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노경이고, 어머니는 기계 유씨다.

그가 태어난 추사고택은 본래 53칸의 집이었다고 하니, 큰 부자집이었다. 김정희의 집안은 조선후기에 뼈대 있는 세도가의 가문이었다. 당파로는 조선후기 300년간 장기집권한 노론 집안이었다. 순조 시절에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가 추사의 11촌 대고모였다.

고조할아버지 김홍경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김한신은 38세의 나이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김한신의 집안은 조카였던 김이주가 양자로 들여 집안을 이어갔는데, 김이주가 김정희의 할아버지다. 김이주는 광주부윤, 대사헌, 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고, 네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김노영은 후사가 없었고, 막내였던 김노경이 자신의 장남 김정희를 김노영의 양자로 들이게 해 가문을 잇도록 했다. 추사는 김노영을 양부로, 김노경을 친부로 성장했다.

추사에게는 김명희, 김상희 두 동생이 있었다. 두 아우 모두 큰형인 추사의 글씨를 빼닮은 듯이 써서 낙관이 없으면 구별할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명희는 추사의 글을 대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는 어렸을 때 신동 소리를 들었다. 여섯 살 때 입춘대길(立春大吉) 글씨를 써서 대문앞에 내걸었는데, 북학파 거두인 박제가(朴齊家)가 지나가다가 이 글씨를 보고 추사의 부친을 뵙고 이 아이는 앞으로 벼슬로 이름을 날릴 것이니, 제가 가르치겠습니다고 해 그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일곱 살 때에 입춘첩을 대문에 내걸었더니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이는 필시 명필로 이름을 한세상 떨칠 것이다. 그러나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세도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천재적 두뇌를 가진 김정희의 인생은 잘 나가는 듯했다. 182134세의 김정희는 대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는 부친 김노경과 함께 요직을 섭렵했다.

그런데 어지러운 정쟁의 시대를 살던 그도 파편을 맞았다. 1830년 부친 김노경이 탄핵받는 일이 발생했다. 김정희는 아들로서 꽹과리를 치며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노경은 강진 고금도에 절도안치(絶島安置)되었다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김정희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년 부친이 세상을 떴고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것도 잠깐,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 세력들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해 그를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제주 유배기간에 나온 걸작품이 세한도다.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그는 18499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풀려나 서울 용산 한강변에 살다가 다시 1971년 융배 길에 올랐다. 두 번째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 밑을 뚫고, 1천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정도의 예술혼을 지켰다. 그는 말년에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한도 /문화재청
세한도 /문화재청

 

김정희의 삶은 그가 제주 유배생활 5년째인 1844년에 그린 세한도(歲寒圖)에 집약되어 있다.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다.

김정희는 나이 59세에 수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었다. 이상적은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책을 구해 보내 귀양살이 하는 스승에게 보내드렸다. 추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정성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리고 발문을 썼다.

그림에는 둥근 문이 있는 집 좌우로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화면의 반이 여백으로 남아 있다. 집조차 너무 허름해서 추워 보인다. 한겨울의 메마름을 물기가 거의 없는 바짝 마른 까슬까슬한 붓질로 표현했다.

그는 그림 옆에 자신의 생각을 넣었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송백지후조(松柏知後凋)” ,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했다. 그의 그림에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송백지후조의 글귀와 조화를 이룬다. 그는 나뭇잎이 기운차게 솟아올라 있는 모습으로 붓에 힘을 주었다.

김정희는 세한도 발문에 이런말도 썼다.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이상적)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 주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섬에, 그것도 울타리 안에 갇혀 잇던 김정희에게 서책은 유일한 탈출로였다. 그는 제자 이상적이 연경(베이징)에서 구해온 책을 보면서 차디찬 세한의 시간을 잊었을 것이다.

 

1844년 스승에게서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감격했고 그해 음력 10월 연행길에 김정희의 서화를 가져갔다. 1845년 음력 1월 그의 연경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만찬에 세한도를 내놓았다. 중국인 친구들은 세한도에 감탄하며 16명이 감상 글을 남겼다.

처음에 길이 108.2cm였던 세한도는 다채로운 사연이 덧붙여지면서 1,469.5cm의 두루마리가 되었다.

 

세한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 이상적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았다. 그뒤 휘문의숙 설립자인 민영휘의 소유가 되었다가 어떤 사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김정희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넘어갔다.

1944년 말 진도 출신 서화가 손재형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세한도를 찾기 위해 미군의 공습이 이어지던 일본 도쿄로 후지쓰카를 찾았다. 3개월간 고생을 한 끝에 손재형은 드디어 세한도를 얻게 되었다. 손재형은 간곡하게 후지쓰카를 설득했고, 이 일본인은 한국인의 정성에 감복해 세한도를 내주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수도 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453월 미군의 공습으로 후지쓰카의 서재가 불에 타버린 것이다.

손재형도 끝내 세한도를 지키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여러 차례 출마하는 바람에 돈이 궁해지자 세한도를 저당잡혔다. 사채업자 이근태는 세한도를 고서화 수집가 손세기에게 팔았다. 그후 세한도는 그의 아들 손창근에게 넘어갔고, 손창근씨는 2020년 아무런 조건 없이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제 기나긴 여정을 거쳐 세한도는 국민의 품에 돌아온 것이다. 세한도는 앞서 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김정희 초상화(김정희 종가유물중) /문화재청
김정희 초상화(김정희 종가유물중)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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