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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외교, 키신저 중재, 닉슨의 중국 방문…22년간 대결구도에 해빙
미중화해①…작은 공이 큰 공을 움직였다
2022. 01. 08 by 김현민 기자

 

19717월초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박사는 파키스탄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의 직책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었다. 키신저 박사는 갑자기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공식일정을 취소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79~11일에 적성국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는 중국의 2인자인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키신저에 대한 중국의 첫 대우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의 호텔 방에는 미국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선전 팜플렛이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저우언라이는 그를 따듯하게 맞았다. 키신저는 방중기간에 마오쩌둥도 만났다. 마오쩌둥은 닉슨 대통령이 대통령 자격이든 개인 신분이든 중국을 방문하면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생산적이었다.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을 제의했고, 저우언라이도 이를 받아들였다.

715일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의 중국 방문을 공개하며, 마오쩌둥의 초청을 받아들여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닉슨의 발표는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닉슨과 키신저는 대만의 장징궈(蔣經國) 총통에게 마오쩌둥과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대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철섞 같이 약속했었다. 그러던 미국 지도층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꿔 중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고 했다. 중국과 8년간 전쟁을 치렀던 일본은 미국에 앞서 중공과 관계개선을 추진했지만 미국이 저지했다. 일본은 미국에게 허를 찔렸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전에서 피를 흘린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려는 움직임에 놀라 독재체제를 강화할 움직임을 보였다.

미국과 중국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애리조나주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공화)는 닉슨의 결정을 비난했다. 중국에서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된 린뱌오(林彪)를 중심으로 군부가 반대했다. 린뱌오는 곧이어 그해 9월에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각되었고, 미국내 여론도 닉슨의 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대만과 한국은 고래 싸움에 새우 격으로 자력으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1971년 헨리 키신저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위키피디아
1971년 헨리 키신저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위키피디아

 

미국은 애초부터 중공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910월 중공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현실적인 권력으로 중공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미국 조야는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음모에 반발하게 되었고, 트루먼도 중공 승인을 거부했다. 그후 미국에선 트와이트 아아젠하워 대통령 시절에 매카시즘 열풍이 일어나 장제스의 대만정권만 인정하고 대륙의 공산정권은 부정했다. F, 케네디 대통령도 현실을 인정하려 했지만 쿠바 위기를 처리하면서 공산권과의 타협을 시도하지 못했다.

중공정권이 수립된지 22년째가 되던 해에 미국의 공화당 정부가 드디어 중국의 현실세력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 사이에 세계도 많이 변했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다시 부상했고, 서유럽이 재건되어 2차 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가 다극체제로 전환되었다. 닉슨 정부는 이데올로기에 고착된 동서 양극체제를 해체하고 다극체제로 전환하면서 현실의 세력인 중공정권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중공의 입장에서도 미국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중공에게 미국은 그동안 대만 해방을 방해하고, 중국을 봉쇄하는 제국주의자였다. 그런데 중국 공산정부에 주적이 미국에서 소련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위치도 바뀌어야 했다. 특히 소련은 1968년 체코 민주화운동을 군대로 짓밟고 브레즈네프 톡트린을 발표, 공산권에서 이탈할 경우 무력으로 개입할 것을 선언했는데, 중국은 그 선언이 자국에도 적용될 것을 두려워 했다. 1970~1972년 사이에 시베리아철도는 소련군대의 이동과 군수물자 수송으로 비군사적 운송이 중단되기도 했다. 소련이 중국 국경에 엄청난 수의 군대와 무기를 배치한 것이다. 중국은 당장에 소련의 핵 공격 위협을 방어할 능력은 없었다. 중공 지도부는 소련의 포위전략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1971년 미국 탁구선수 글렌 코완이 중국선수에게 받은 선물을 보여주고 있다. /위키피디아
1971년 미국 탁구선수 글렌 코완이 중국선수에게 받은 선물을 보여주고 있다. /위키피디아

 

두 적대국이 서로를 원하고 있었지만, 어느쪽도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둘의 화해를 반대하는 세력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우연한 기회에 풀려나갔다.

1971328일부터 47일까지 일본 나고야에서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미국 선수였던 글렌 코완(Glenn Cowan)은 자신이 타야 할 미국팀 버스를 놓치고 다른 버스에 올랐는데 그 곳은 중국팀이 타고 있던 버스였다.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중국 선수 좡저둥(莊則棟)은 미국 선수를 반갑게 맞아주고 중국 명산인 황산(黃山)이 그려진 수건 한 장을 선물했다. 이에 코완은 좡쩌둥에게 ‘Let it be’ 문구가 새겨진 삼색 셔츠를 선물했다.

중국선수단 취재를 나온 일본 기자들이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의 모습을 찍었고, 다음날 일본 신문 곳곳에서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리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사연이 알려지자 코완은 인터뷰에서 “‘중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 소식이 저우언라이를 거쳐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다. 마오쩌둥은 쾌히 미국 선수단의 중국 방문을 수락했고, 미국 정부도 허용했다.

410일 미국 선수단은 중국 대표단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그들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면담하고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을 여행하며 귀빈 대접을 받았다. 미국 선수단은 중국에서 몇차례 탁구경기를 했다. 탁구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 강자다. 중국 선수들은 월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몇 경기를 져 주었다고 한다.

 

중공의 유엔가입과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선언한 1971년 유엔총회 결의안 /위키피디아
중공의 유엔가입과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선언한 1971년 유엔총회 결의안 /위키피디아

 

미국과 중국을 가로막았던 만리장벽이 2.9g의 자그마한 탁구공 하나로 무너졌다. 미중 친선탁구대회 이후 키신저가 방문하고, 미국과 중국은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물밑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키신저는 7월에 이어 10월에 또다시 중국을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의 목적은 중공의 유엔가입이었다. 중국측은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대만의 유엔 탈퇴를 전제로 가입하겠다고 우겼다. 미국이 중국과 화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대만 문제였다. 중공은 두 개의 중국이 동시에 유엔에 의석을 가질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의 유엔대사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조지 W. H. 부시였다. 부시는 중공과 대만이 동시에 가입하는 ’2개의 중국원칙을 주장했다. 키신저는 부시의 주장에 부정적 의견을 피력했다. 키신저는 하나의 중국을 받아들이지 않고선 중국을 국제무대에 등장시킬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키신저는 중국의 요구에 굴복했다.

19711025일 유엔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결의안 2758호를 통과시켰다. 이로써 대만은 유엔 회권국 자격을 박탈당했다. 중공은 대만을 대신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도 꿰어찼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함께 중국은 세계 5대 강국의 대우를 받게 되었고, 주요한 국제문제에 비토권을 갖게 되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해를 넘겨 1972221일 닉슨 대통령은 역사적인 중국방문을 시작했다. 닉슨은 베이징 공항에 마중나온 저우언라이와 악수를 했다. 1954년 존 덜레스 국무장관이 제네바에서 저우언라이와의 악수를 거절한 이후 18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닉슨은 마오쩌둥을 만나 환영을 받았고, 78일간 베이징, 항저우, 상하이를 방문했다.

방문 마지막날인 228일 닉슨은 미중 실무진이 합의한 상하이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양국간 당장의 국교수립을 명문화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국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연락채널로 활용하기로 했다. 성명은 또 하나의 중국이슈에 대해 미국은 중국인들의 하나의 중국정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타협했다.

닉슨은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중국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지 않았다. 국내 보수공화당원들도 의식해야 했고, 대만 문제의 해결책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도 문화혁명 시기였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와의 타협을 반대하는 극좌파를 달랠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닉슨의 방문을 계기로 20여년간 얼어붙었던 미국과 중공의 적대적 관계에 해빙이 온 것은 분명하다.

 


<참고자료>

Wikipedia,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2758

Wikipedia, ChinaUnited States relations

Wikipedia, 1972 visit by Richard Nixon to China

Wikipedia, Ping-pong diplomacy

Wikipedia, Henry Kissinger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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