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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훈장 받으며 고속승진…국민당, 공산당 정부 인정, 문화혁명 때 곤욕
신해혁명 주인공 지목된 슝빙쿵…푸이와 면담
2022. 01. 13 by 김현민 기자

 

19111010일 저녁 7, 후베이성 우창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 총성을 계기로 우창(武昌)에 주둔하던 청나라 신군 공병 제8영이 반란을 일으키고 우창봉기가 일어났다. 우창봉기는 신해혁명의 시초로 평가된다. 신해혁명은 300년 청조의 숨줄을 끊었고, 중국 역사에 수천년을 내려온 봉건 왕조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러면 중국인들이 기념하는 쌍십절(1010)의 총성은 누가 울렸을까. 중국 역사학계에는 110년전에 일어난 이 사건의 주인공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첫 총성을 울린 사람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여려명 된다. 그중 공인되는 인물이 슝빙쿵(熊秉坤)이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것이지, 역사학계에서 그를 첫 발사자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1912년 슝빙쿵 /維基百科
1912년 슝빙쿵 /維基百科

 

슝빙쿵은 18841222일 후베이성 장샤(江夏)현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짐을 나르는 노동자였는데, 신군(新軍)에 입대, 분대장급인 정목(正目)으로 승진했다. 그의 분대는 후베이성 신군 제8() 공병 제8() 소속이었다.

우한의 부대는 쓰촨성의 민중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대 내에는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라는 혁명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두 조직은 쑨원의 동맹회와 연대하고 있었다. 슝빙쿵은 공진회 회원이었다.

병사들은 쓰촨으로 출동하기 위해 총기를 정비하고 있었다. 소대장(초관)인 타오야오셩(陶啓勝)이 병영을 순시하다가 진자오룽(金兆龍)이란 병사에게 호통을 쳤다. 진자오룽이 대들었다. 둘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나고, 분대장이었던 슝빙쿵이 소대장에게 총을 쏘았다고 한다. 여기서 진자오룽이 총을 먼저 쏘았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이 부대에서 일어난 총성이 신해혁명의 신호탄으로 공식 인정되었고, 첫 총성의 격발자가 슝빙쿵이었다고 상부에 보고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이를 인정했고, 위안스카이 사후 총통을 지낸 리위안훙, 쑨원,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도 슝빙쿵을 신해혁명의 주인공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분대장에 불과하던 슝빙쿵은 그후 고속으로 승진했다. 혁명군은 지휘관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민군 제5협 통령(여단장급)이 되었고, 1913년 위안스카이에 의해 육군소장으로 승진했다.

그후 쑨원의 편에 섰다가 2차 혁명에 실패하는 바람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장제스 정권에서 국민당 원로로 육군 중장의 대우를 받았다. 1949년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후베이성 인민위원과 전국정협위원 등을 맡았다.

 

1913년 1월, 위안스카이가 슝빙쿵에게 수여한 훈장. /維基百科
1913년 1월, 위안스카이가 슝빙쿵에게 수여한 훈장. /維基百科

 

슝빙쿵이 유명세를 떨친 것은 1961년 베이징에서 신해혁명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을 때였다. 슝빙쿵이 신해혁명의 주인공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자신의 거사로 퇴위하게 된 청의 마지막황제인 선통제 푸이(溥儀)를 만나고 싶어했다. 저우언라이가 직접 주선에 나섰다. 푸이는 2차 대전 종전후 소련에 끌려갔다가 중국에 되돌아와 푸순 감옥에서 10년간 옥살이를 했고, 당시엔 풀려나 평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19611113일 일개 사병과 대청제국 황제였던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만났다.

푸이는 슝빙쿵에게 말했다. “당신은 총 한자루로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니, 가히 영웅이라 할만하다. 실로 놀랍다. 그때 나는 오린 황제였지만 역사의 조류를 타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슝빙쿵은 대답했다. “우리는 예전에 원수였다. 당신은 황제였고, 나는 반란군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세상이 되어 모두가 친구가 되었다.”

푸이는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개조되었을까. 그의 말이 진심이었을까. 한때 황제였던 사람의 말을 곧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공식 대화록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분명한 건 이 행사가 중국 공산당 선전용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1961년 10월 13일 신해혁명 50주년 기념행사에 슝빙쿵(오른쪽)과 푸이(왼쪽) /維基百科
1961년 10월 13일 신해혁명 50주년 기념행사에 슝빙쿵(오른쪽)과 푸이(왼쪽) /維基百科

 

슝빙쿵은 문화대혁명 때에 곤욕을 치렀다. 그는 홍위병에게 신해혁명의 공로로 위안스카이에게 받았던 훈장을 빼앗겼다. 그는 나중에 훈장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1969530일 그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저우언라이가 애도하는 가운데 우창 혁명열사 묘역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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