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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청과 장뱌오, 총소리에 도망친 淸朝 고위층…혁명의 방조자들
“그들이 달아 났기에 신해혁명 성공했다”
2022. 01. 15 by 김현민 기자

 

쑨원(孫文)은 훗날 신해혁명이 신속하게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 확실하게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행운을 만들어 준 사람은 만주족 총독이었던 루이청(瑞澂)과 군 사령관이었던 장뱌오(張彪)였다. 그들은 혁명의 총성이 나자마자 놀라서 도망쳤다. 두 사람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했더라면 2,000명에 불과한 오합지졸의 반란세력을 초기에 섬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도주해 행운이 만들어졌고, 그 행운은 북양군벌 위안스카이에게 돌아갔다.

 

루이청(1863~1915)은 우한봉기 시기에 호광총독(湖廣總督)이었다. 호광총독은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 2개 성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지방관직이다.

만주족 8기의 하나인 정황기(正黃旗) 사람으로, 성은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 할아버지 치산(琦善)는 대학사(大學士), 아버지 공탕(恭鏜)은 헤이룽장(黑龍江)장군을 각각 역임한 금수저 출신이다. 어렸을 때 방탕했으며, 명문가 자손으로 베이징의 3대 악동으로 불렸다.

그러던 그는 나이가 들어 관직에 맡은 후에는 나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형부(刑部)와 호부(户部)를 거쳐 1906년 외직으로 장시(江西)성 구장(九江)에서 근무했다. 그후 상하이로 임지를 옮겨 각국 공사들과 교섭하는 일을 맡았다. 1908년 장시(江西)와 장쑤(江蘇)에서 근무했고, 선통제 원년인 1909년에 양강총독 돤팡(端方)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추천했고, 조정은 그를 장쑤성 순무로 발령했다. 장쑤 순무 시절에 그는 군기를 엄정히 다스리고 치안을 강화했으며, 입헌운동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1910년에 그는 호광총독으로 승진해 부패한 관리를 탄핵하고 해임해 민심을 샀다.

 

호광총독 시절 루이청 /維基百科
호광총독 시절 루이청 /維基百科

 

만주족 귀족 출신이었기에 그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하루의 상황 실수로 그의 종족이 건국한 청나라가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111010일 저녁 7, 후베이 성도 우창(武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2,0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무기고를 습격했고, 무기고를 지키던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도망쳤다.

1030분 반란군은 호광총독 루이청의 관저와 제8진 사령부를 공격했다. 8진의 통제(사단장)는 장뱌오였다.

총독 관저 수비병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비병들은 맹렬하게 사격을 퍼부어 일단 반란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8진의 사령관 장뱌오는 반란군에게 원대복귀를 명령했다. 전황은 일진일퇴했다. 반란군은 기세만 등등했지. 오합지졸이었고, 지휘계통이 엉망이었다. 루이청과 장뱌오가 강경하게 진압했더라면 우창 봉기는 역사책에 나올까 말까 하는 군 소요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만주족 귀공자 출신이었던 루이청은 관료로선 유능했지만 군인으로선 무능했다. 그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관저에 포탄이 떨어지자 그의 처첩, 자식들, 측근들이 혼비백신했다. 설사 가족을 대피시키더라도 그 자신은 지휘부를 지켜야 했다. 그런데 그는 강가에 대기하고 있던 추우이’(楚豫)호에 올라 상하이로 도주했다.

 

장뱌오 /維基百科
장뱌오 /維基百科

 

루이청이 도주했더라도, 군 사령관인 장뱌오가 군대를 지켰더라면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뱌오 휘하 제8진의 병력은 1만여명이었고, 초기 반란에 참여한 군대는 1,000여명에 불과했다. 사령관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총독 루이청이 도주하자 자신도 급히 피해 한커우(漢口)의 자기집 사당에 한동안 숨어 있었다.

총독과 사령관이 한꺼번이 도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느쪽에 설지 눈치를 보던 대다수의 군대가 혁명군에 흽쓸렸고, 11일 새벽에 우창 전체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래도 루이청은 도주한 상태에서 베이징 조정에 상황을 보고했다. 그의 보고를 받은 조정은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중앙군을 파견했다.

루이청은 또 우한삼진(우창, 한커우, 한양)에 주재한 외국 영사들에게 포함을 파견해 혁명군을 포격해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영사는 지금의 형세가 의화단 사건 때와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의 영사들은 중립을 지켰다. 1012일 헌커우와 한양도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쟝뱌오(1860~1927)는 산서(山西) 사람으로 기회주의적 군인이었다. 그는 은거해 있다가 중앙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슬그머니 나와 진압군에 참여했지만 패주했다.

 

우창봉기가 발발했을 때 쑨원은 미국에 있었다. 봉기 소식을 들은 쑨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창의 성공은 그야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은 루이청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가 달아나지 않았다면 장뱌오도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우창 신군 중에서 혁명파 병사들은 대부분 쓰촨으로 출동해 있었고, 소수의 동지들만 남아 있었다. 그 소수가 모험을 강행해 공을 세웠다. 하늘이 한족을 도왔기에 만주족을 멸망시켰다.”

 

청조는 루이청의 관직을 삭탈했지만 처벌을 유예했다. 반란을 진압하면 용서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지레 겁을 먹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조가 멸망한 후 그는 상하이로 돌아와 일본 조계에서 4년간 외롭게 살다가 1915년 병으로 사망했다.

쟝바오도 청나라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이듬해 귀국해 톈진의 일본 조계에서 저택을 만들어 살았다. 그는 신생정권인 중화민국과 과거 정권인 청조에 양다리를 걸쳤다. 1924년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이 톈진을 들를 때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중화민국 정부에서 고문으로 영입되어 육군 중장의 칭호에 일급 명예훈장을 받았다.

한편으로 장뱌오는 1925년 선통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자 자신의 장원으로 초대, 머물도록 배려했다. 그는 푸이를 지극 정성으로 모셔 황제의 처소를 직접 청소하기도 하는 충성심을 보였다. 장뱌오는 1927년 병사했다.

 


<참고자료>

維基百科, 瑞澂

바이두백과, 张彪

維基百科, 張彪 (山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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