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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마크, 모피 구하기 위해 시비리 정벌 나서…그 후예, 캄차카, 알래스카까지
러시아, 시베리아 개척 나서다…시비르 합병
2019. 06. 06 by 김현민 기자

 

우랄 산맥 서쪽에 광대한 영지를 확보하고 있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1558년 차르 이반 4세로부터 산맥을 넘어 타타르를 내쫓고 모피 무역거래를 하라는 허락을 받는다. 차르의 윤허에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원 없이 혼자 힘으로 하라는 것이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정부로부터 자금도, 병력도 지원받을 수 없었다.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코사크족(Cossacks, 카자크족라도 한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코사크를 이용해 타타르를 제압하는 러시아식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남러시아에 남아있던 몽골제국의 후예인 카잔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벌한지 30년후, 러시아는 우랄산맥 넘어 있는 또다른 칭기스칸 후예 시비르(Sibir) 칸국을 정벌하기 위해 동방원정에 나선다.

 

우랄산맥 서쪽에 남아있던 타타르족과 코사크족은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우랄 산맥 동쪽으로 쫓겨나 있었다.

예르마크 초상화 /위키피디아
예르마크 초상화 /위키피디아

 

두 종족은 연대를 하지 않았다. 종족이 달랐고, 종교가 달랐다. 몽골과 투르크족이 합쳐진 타타르는 이슬람교도들이었는데 비해 코사크족은 러시아 정교를 믿었다.

코사크족은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떠돌던 유목민족이다. 그들의 기원에 관해서는 역사학자들마다 다르지만, 키예프공국이 망한 후 그 유민과 쿠만족, 체르케스인등 남러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리스정교를 믿고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점에서 러시아인들과 공통점을 갖지만 생활습관과 문화는 슬라브족과 완전히 이질적인 민족이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코사크족을 회유했다. 러시아 정교를 위해 이슬람에 대해 성전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 무렵 볼가강에서 해적질을 하던 코사크족 무리가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예르마크 티모페에비치(Yermak Timofeyevich)였다. 시베리아는 삼림이 울창하고 동토가 많아서 큰 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거래와 이동이 이뤄졌다. 볼가 강에서 해적 노릇을 하던 무리들이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붙었다.

예르마크는 코사크족 한 분파의 족장(헤트만)이었고, 이반 콜트소의 무리등 4~5개 부족이 그를 따랐다. 콜트소는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는 노가이(Nogai) 칸국을 공격한 죄로, 러시아 왕실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이교도와의 싸움에 동참하면 차르의 용서를 받을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코사크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시비르 한국 /위키피디아
시비르 한국 /위키피디아

 

예르마크에 대한 객관적 사료는 거의 없지만, 러시아의 민담이나 민요, 민화등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후대의 사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내용들이어서 정확치는 않지만, 예르마크는 러시아를 오늘날 세계 최대영토의 국가로 만들어준 인물임은 틀림없다. 마치 청나라에 쫓긴 명나라 유신이자 해적인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을 정벌한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선 새 영토를 확보해준 전설적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다.

코사크족은 약탈로 생계를 이어나가던 족속이었다.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수 없었던 것은 러시아의 슬라브족 때문이다. 러시아는 변경지역에 거주하던 코사크족을 수탈했고, 그들은 좇겨다니며 그들보다 더 약한 종족과 계급을 약탈했다. 그 즈음에 약탈은 힘센 자의 논리이자 권리였다.

예르마크 휘하의 코사크 기병대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으로부터 타타르족에 대한 약탈을 허가받았다. 게다가 화포와 식량, 화승총을 제공받았다.

1579년 예르마크의 코사크 기병대는 동진했다. 예르마크의 초기 병력은 840명이었다.

처음 마주친 타타르 부족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부굴(Vogul)과 오스티아크(Ostiak)족은 깊은 숲속에서 가족 단위로 거주했는데 코사크군의 진격이 곧바로 항복했다. 이어 대규모 부족국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시비르 칸국이었다.

시비르 칸국은 징기스칸의 몽골()제국 영토였다가 몽골의 한 갈래인 킵차크 칸국 소속으로 편입되었으며, 나중에 티무르 제국에 복속한 타타르족 왕국이었다. 몽골 또는 투르크족은 왕을 칸 또는 한으로 표시한다. 시비르 칸국의 마지막 칸인 쿠춤(Koutzum)은 티무르의 후손이었고, 수도 이시리(Ishir)는 목책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시베리아(Siberia)라는 이름은 시비르(Sibir) 칸국에서 유래한다.

 

코사크족의 시비르 칸국 정벌전 (Vasily Surikov 작) /위키피디아
코사크족의 시비르 칸국 정벌전 (Vasily Surikov 작) /위키피디아

 

1583년 코사크 기병대는 시비르 칸국의 수도 이시리에서 쿠춤 칸과 맞붙었다. 쿠춤 칸의 군대는 성문을 닫아걸고 농성작전을 펼쳤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이 거듭됐다. 마침내 에르마크가 후퇴 작전을 펴서, 쿠춤 칸의 군대를 성 밖으로 유인해낸 후 성 안을 급습하여 수도를 장악했다. 타타르족의 무기는 화살이었고, 총과 포는 없었다. 코사크 부대는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러시아가 제공한 화기로 타타르 군대를 제압했다.

시비리 한국의 영토는 웬만한 유럽의 한 나라에 버금가는 넓이였다. 예르마크는 그 큰 땅을 이반 4세에게 바치며, 덤으로 시비리 한국에서 빼앗은 모피들을 상납했다. 이반 4세는 크게 기뻤다. 차르는 예르마크와 그의 부하들의 죄를 사해줌과 동시에 사슬로 된 갑옷을 하사했다고 한다.

차르의 칭친을 받은 예르마크는 용기백배, 동진을 계속했다. 패배한 쿠춤 칸은 잔여 병력을 모아 반격을 꾀했다. 15858월 쿠춤 칸은 예르마크의 부대를 기습했다.

예르마크는 부상을 당해 도망치다가 이르티슈 강에 빠져 익사했다. 그때 그는 이반 4세가 하사한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강에서 헤엄쳐 나오지 못했다고 전해온다.

코사크 부대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지만, 이번엔 이반 4세가 러시아 정규군을 투입해 1598년 시비리 칸국을 멸망시켰다.

 

수로를 따라가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로 /위키피디아
수로를 따라가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로 /위키피디아

 

예르마크의 시비리 칸국 원정을 시작으로, 러시아는 코사크족을 앞세워 시베리아 진출을 가속화한다. 이반 4세를 이은 피오트르 대제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경로가 있는지 궁금하다며 코사크족에게 탐험명령을 내렸다. 차르는 캄차카까지 가서 아시아와 미국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라. 남북방향과 동서 방향 모두를 확인하고 본 것을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피오트르 대제의 명을 받은 코사크 부대는 1639년 태평양에 다다랐고, 1648년 또다른 코사크 집단이 5척의 배를 타고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예르마크가 죽은지 60년만에 러시아는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진출한 것이다. 남으로는 아무르강에서 청나라와 충돌해 국경을 정하는 조약(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당시 시베리아로 향한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모피였다. 그 곳에는 검은 담비, 족제비, 비버 등 털과 가죽이 좋은 동물이 많았다. 러시아의 교역에서 모피는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 부산물로 금·은도 발견되었다.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의 원주민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원주민들은 모피를 세금으로 바치는 댓가로 보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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