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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에서 공산주의자로…마지막엔 일본에 투항한 변절자
파란만장한 삶을 산 독립운동가 오성륜
2022. 01. 18 by 박차영 기자

 

독립운동가 오성륜(吳成崙)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1900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명확치는 않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1905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뒤늦게 중학교를 다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모금에 뛰어들었고,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했다.

오성륜은 조선과 만주에서 수많은 테러를 했으며, 1922년 독일인 마르틴과 둘이서 압록강철교 파를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오성륜은 그후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 지도자 김약산 등을 만났다. 님 웨일즈의 책 아리랑에서 주인공 김산은 김약산과 오성륜이 당시에 가장 뛰어난 두명의 조선인 테러리스트라고 소개했다.

김산의 설명에 따르면, 오성륜은 19243월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에서 일본인 남작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의 암살을 시도했다. 다나카는 328일 배를 타고 상하이 황푸탄(黃浦灘) 부두에 내릴 예정이었다. 그들은 먼저 오성륜이 권총으로 저격하고, 그 다음에 김익상이 폭탄을 투척하고,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칼로 찌른다는 계획을 세웠다.

예정된 시간에 배가 도착하고 다나카가 하선하고 있었다. 오성륜은 다나카가 8m 거리까지 접근하자 총을 쏘았다. 그의 앞에는 미국 여인이 내려왔는데, 총소리에 놀라 돌아서서 다나카를 껴안았다. 오성륜은 정조준을 해 사격했는데, 스나이더 부인이란 미국 여인은 세발을 맞고 사망하고, 다나카는 죽지 않고 쓰러졌다. 오성륜은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도망쳤다.

뒤어어 김익상이 폭탄을 던졌으나, 영국인 선원이 폭탄을 걷어차 바다에 빠트려 버렸다. 김익상도 도망쳤다. 이종암은 폭탄 투척이 실패한 것을 보고 달아났다.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다나카 대장에게 폭탄투척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1922년 4월 7일자) 오성륜(吳成崙, 右, 23세)과 김익상(金益相, 左, 28세).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다나카 대장에게 폭탄투척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1922년 4월 7일자) 오성륜(吳成崙, 右, 23세)과 김익상(金益相, 左, 28세).

 

오성륜은 한커우로(漢口路)까지 도망쳤다. 그는 그곳에서 자동차를 뺏아 몰고 가다가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프랑스 조계에 살았으므로, 영국 경찰은 프랑스 경찰에게 그의 신변을 넘겼다. 프랑스 경찰은 일본영사에게 오성륜을 넘겼고, 오성륜은 일본 영사관 3층 감방에 갇혔다.

감방에는 5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오성륜은 52일 새벽에 일본 죄수들의 도움으로 자물쇠를 자르고 탈옥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탈옥 사실은 신문에 실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성륜은 미국인 친구 집에 가서 사흘동안 숨어 있다가 광둥으로 탈출해 그곳에서 여권을 위조해서 독일로 갔다. 베를린에서 그는 독일인 여인과 사랑에 빠져 1년동안 체류하다가 1925년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르크스 이론과 투쟁 전술을 배워서 테러리스트에서 공산주의자로 변신했다.

1926년 그는 다시 상하이로 갔다. 일본 경찰이 그의 출현 사실을 알고 상하이 시내를 감시했다. 그는 짐을 먼저 부치고 몸만 갔는데, 짐은 일본 경찰에게 압수당했다. 오성륜은 이어 광둥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11당의 원칙을 내세워 중국에서 조선인들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도록 했다. 그는 곧이어 광둥 코뮌에 참여하고,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인 하이루펑(海陸豊) 소비에트에도 참가했다.

 

하이루펑 소비에트가 국민당 군대에 진압된 이후 그는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조직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엔 전광(全光)이란 가명으로 화동했다. 1936년 동만특위 서기 위극민(魏極民) 밑에서 위원을 지냈으며, 동시에 제1로군 제2군 당위원회 정치주임도 역임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 반제통일전선 채택하자, 이에 1936610일 엄수명(嚴洙明이상준(李相俊) 등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했다. 그리고 남만성위원회 상무위원선전부장으로서 제1로군 비서차장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위키피디아 중국어판에 따르면, 오성륜은 김일성의 상관이었는데, 1937년 보천보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그는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경찰의 토벌작전에 쫓겨 투항했다. 이후 이후 일본에 협력해 만주국 치안부 고문을 지냈다. 그는 만주국 러허성(熱河省)에서 나카무라 히데오(山本秀雄)라고 개명하고 활동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만주국이 멸망한 이후 그는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의 죽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국내에서는 그가 만주에서 인민재판을 받아 타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퉁화(通化)현에서 중공 팔로군에 잡혀 1947년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님 웨일즈·김산, 아리랑, 동녘, 198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성륜(吳成崙)

維基百科 吳成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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