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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주구…조선인혁명가 김산 처형, 시진핑 부친 시중쉰 숙청
‘붉은 공포’의 대명사 캉성, 무덤도 파헤쳐 졌다
2022. 01. 24 by 김현민 기자

 

캉성(康生)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 악명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조선인 혁명가 김산(장지락)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勲)을 숙청했다.

캉성(1898~1975)은 옌안 시절부터 중국 공산당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의 반대파는 물론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붉은(紅色) 공포의 대명사로 지목되어 왔다. 그는 197577세로 자연사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권력자으 쫓아 다니는 기회주의자였고, 자신의 주군에 충실한 주구(走狗)에 불과했다. 그의 별명이 개대가리 참모(狗頭軍師)였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사후에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바바오산 혁명묘지에서 그의 시신이 파헤쳐 졌다.

 

캉성 /위키피디아
캉성 /위키피디아

 

그는 산둥성에서 대지주이자 봉건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슈핑(張叔平)이고,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캉성으로 개명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출세 지향적이었다. 칭다오에서 독일계 학교를 다니면서 10대에 천이(陳宜)라는 여인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두었다.

1924년 그는 상하이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공산주의자 취추바이(瞿秋白)를 알게 되어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5년 상하이 5·30 반일노동자 시위에 가담하면서 류사오치(劉少奇), 리리싼(李立三), 장궈타오(張國燾) 등 공산당 지도부를 알게 되었다. 19273월 상하이 폭동에 가담했다가 장제스가 주도한 상하이 쿠데타를 피해 도주했다.

그의 첫 번째 배신은 부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1927년에 상하이대 출신 차오이오우와 결혼했다. 머릿 속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일부다처의 봉건적 결혼관을 당연시한 이중적 인물이었다.

1930년 캉성은 상하이에서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동지를 팔아서 금방 풀려났다고 한다. 그 사실을 동료 루푸탄이 1933년에 증언했다. 하지만 그는 체포된 사실 자체가 없다면서 루푸탄의 주장을 원천봉쇄했다.

 

캉성은 처음에는 코민테른이 밀고 있는 리리싼을 따랐다. 그런데 리리산이 1930년 창사폭동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실각하고 왕밍(王明)이 떠올랐다. 그는 왕밍의 밑에 들어가 리리싼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왕밍의 반대파 허멍슝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국민당에 제보해 체포되게 했다. 허멍슝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캉성은 왕밍에 충성한 덕분에 공산당 비서장으로 승진했다.

1931년 캉성은 모스크바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규모 숙청을 벌이는 것을 보았고, 소련 비밀경찰 NDVD의 수법을 면밀히 연구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도 중국인을 숙청하는데 가담했다고 한다.

캉성이 중국에 되돌아온 시기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711. 그때는 왕밍이 실각하고 마오쩌둥이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이번에는 왕밍을 저버리고 마오쩌둥에게 붙었다. 마오는 당시 절대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파가 자신을 지지하는 것이 고마웠다. 마오쩌둥은 옌안에서 정풍운동을 벌이며 캉성에게 '사회부'라 불리는 정보기구를 맡겼다. 이때 캉성은 산둥성 고향 출신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이 될 장칭(江青)을 알게 된다.

캉성은 마오쩌둥의 앞잡이가 되어 왕밍을 공격, 실각시키는 데 결정타를 날렀고, 마오의 정적둘울 국민당과 일본의 첩자로 몰아 숙청했다. 이때 조선인 대표로 옌안에 파견되었던 김산도 트로츠키주의자와 일본의 첩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마오쩌둥과 캉성 (1945, 옌안) /위키피디아
마오쩌둥과 캉성 (1945, 옌안) /위키피디아

 

마오쩌둥의 정풍(整風)운동은 당의 기풍을 쇄신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동안 다양하고 다소 낭만적인 공산주의 사상을 마오쩌둥 사상으로 집약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사회주의 작가로 유명한 소피의 일기저자 딩링(丁玲)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예술인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캉성은 당의 정신개조 작업에 충성스런 당원들에게 고통과 갈등을 유발하는 악랄한 수법을 채택했다. 그의 눈에 조금 이상하다 싶은 당원에게 국민당 간첩으로 모함하고, 일단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았다. 자백을 하지 않으면 계속 고문을 하고 감옥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수감자는 없는 이야기도 꾸며내야 지긋지곳한 지옥을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자백을 받으면, 그것을 근거로 무더기로 고발과 체포에 나섰다. 그의 동료가 옌안에 그렇게 많은 국민당 첩자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그들을 우선 잡아 들인 다음, 우리는 심문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1938영 김산 /‘아리랑’ 동녘
1938영 김산 /‘아리랑’ 동녘

그는 심리적 압박 수단을 썼다. 바닥에 원을 그리고, 자배할 때까지 그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한 여성은 당신은 당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리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사 스저는 이 시기의 캉성을 이렇게 회고했다. “캉성은 언제나 러시아 재킷울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었으며, 큰 개를 한 마리 끌고 돌아다녔다. 그는 외출할 때마다 뒤에 4명의 보안 요원을 데리고 다녔다. 그는 이미 옌안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는 충실한 개처럼 언제나 주인의 명령에 따라 적들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도 충실하면서도, 자신이 국민당에 체포되었을 당시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캉성은 이런 잔학한 행위를 통해 마오쩌둥의 중국을 탄생시킴과 동시에 스스로 권력의 핵심으로 올라섰다.

 

1949년 국공내전이 종식되고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후 캉성은 동지를 너무 많이 해쳤기 때문에 반대파의 견제를 받았다. 1956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지위가 강등당하기도 했다.

뒤처지던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류사오치를 제거하기 위해 4인방을 앞세워 문화대혁명(1966~1976)을 추진하자, 캉성은 다시 마오쩌둥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번엔 캉성은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시키는대로 했다.

캉성은 펑더화이, 류사오치 등 마오쩌둥에 맞서는 사람을 숙청하는데 앞장 섰고, 문화혁명에 반대하는 인사 361명의 리스트를 작성해 그들을 숙청했다. 또 홍위병을 앞세워 마오 주석을 반대하는 사람과 사상을 비판하도록 했다.

캉성의 숙청 대상에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포함되었다. 시중쉰(1913~2002)은 공산당 원로로. 선전시 경제특구의 고안자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티베트 자치구의 불교 문화 보존에 관심을 기울였고, 반우파운동 확대와 대약진운동에서는 부정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캉성과는 대립적 위치에 있었다. 시중쉰은 1962년 필화 사건에 몰려 해임되었고, 문화혁명이 터지자 반당 분자로 낙인혀 수모를 겪었으며, 19782월까지 16년간 구속되었다.

 

1967년 9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반당분자로 낙인 찍혀 홍위병에 끌려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1967년 9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반당분자로 낙인 찍혀 홍위병에 끌려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하늘을 날던 새도 떨어뜨릴 것 같았던 캉성도 질병과 죽음 앞에는 재간이 없었다. 정풍운동과 문화혁명의 광풍을 주도하던 그는 1974년 이후 암에 시달리면서 입원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권력투쟁에 끼어들었다. 캉성은 마오쩌둥이 부인 장칭을 숙청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장칭이 상하이 시절 공산당을 배반했다는 고발 자료를 마오쩌둥에게 제출했다. 이번에는 줄서기에 실패했다. 마오쩌둥은 장칭을 내치지 않았다. 하지만 장칭이 캉성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19751216일 캉성은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당 서열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왕훙원(王洪文)에 이어 4위였다.

그가 죽은 다음해인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장칭등 4인방이 숙청되고, 캉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사인방의 몰락과 덩샤오핑의 복귀로 캉성은 이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8010월 중국 공산당은 캉성을 제명시켰다.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묻혀 있던 그의 시신은 파헤쳐 졌다.

그의 부인 차오이오우(曹軼歐)는 남편의 복권을 주장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Kang Sheng

레너 미터, 중일전쟁, 글항아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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