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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세계를 돌며 스페인 선박을 약탈해 영국 국부에 기여, 무적함대 격파
드레이크…영국에선 영웅, 스페인에선 해적
2019. 06. 06 by 김현민 기자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영국인들은 그를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한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그가 해적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그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그가 영국의 이익을 위해 노략질을 했고, 그의 약탈 대상이 스페인 선박과 해외 식민지였다는데서 기인한다.

그는 영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인물이고, 당대의 최강 스페인 해군을 무찌른 해군제독이다. 그의 인생은 휘황찬란하고, 흥미진진하다. 그러기에 영국인들이 그를 추앙한다.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모습. (드레이크 동상 밑 부조) /위키피디아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모습. (드레이크 동상 밑 부조) /위키피디아

 

1540년 잉글랜드섬 남서쪽 꼬리 부분에 있는 데본주 타비스톡에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났다. 12명 아들 가운데 맏이로 태어는 그는 어려서부터 바닷일을 배웠다.

18세에 승선해 회계일을 보았고, 23살에 당대의 해적이었던 그의 6촌형 존 호킨스(John Hawkins)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을 다녀왔다.

그의 인생은 존 호킨스와 함께 시작한다. 호킨스를 따라 해적질을 배웠고, 스페인 선박과 식민지를 약탈하는데 참여했다.

28세가 되던 1568년 멕시코 산 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úa)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그는 간신히 살아남아 호킨스와 함께 영국으로 도망쳤다. 그가 스페인에 적개심을 느낀 것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호킨스가 해적질을 그만두고 국내 정치에 참여했지만, 드레이크는 2척으로 자신의 선대를 편성한다.

1572년 그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파나마 지협을 공격키로 한 것이다. 당시 파나마는 스페인이 남미에서 채굴한 금과 은이 집결하는 곳이었다. 그해 7월말 드레이크와 그의 부하들은 정글에 숨어 있다가 스페인 짐 마차를 공격했다. 이 습격에서 드레이크는 부상을 당했고, 그의 부하들이 전투를 중지하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습격을 중단했다. 그들은 1년 가까이 파나마 밀림을 전전하다가 이듬해 3월 스페인 수송대를 다시 습격했다. 이번엔 성공했다. 드레이크가 약탈한 보물은 워낙 많이 배에 다 옮기지 못하고, 남은 것을 인근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그해 8월 그는 개선장군처럼 영국으로 돌아왔다. 스페인은 드레이크를 넘겨주든지, 사형에 처할 것을 영국 정부에 요구했다. 드레이크는 곧바로 숨어 버렸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드레이크가 세계일주를 한 골든 힌드호 모형선 /위키피디아
드레이크가 세계일주를 한 골든 힌드호 모형선 /위키피디아

 

155712월 드레이크는 5척의 배를 이끌고 대서양을 나섰다. 앞서 그는 비밀리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하고 대담한 계획을 보고했다. 남미 끝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 연안을 따라 스페인 배들을 습격한다는 것이다. 여왕도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번 항해는 험난했다. 먼저 서아프리카에 들렀다가 대서양을 건너기 앞서 주변을 행해 중이던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에 2척의 배가 손상되어 동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 반란자 토머스 다우티(Thomas Doughty)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브라질과 라플라타강을 거쳐 마젤란 해협 앞까지 갔다.

그곳에서 예상치 않은 태풍을 만났다. 선단이 격랑에 휩쓸려 멀어져 갔고, 드레이크가 탄 골든 힌드(Golden Hind) 호만 남았다.

골든 힌드호는 태풍에 휩쓸리면서 마젤란 해협을 들어가지 못하고 남미 끝 혼 곳(Cape Horn)과 남극 대륙 사이의 바다를 지나게 되었다. 후에 이 해협을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이라고 부른다.

 

마젤란 해협과 드레이크 해협 /위키피디아
마젤란 해협과 드레이크 해협 /위키피디아

 

출발한지 10개월째 되는 15789월 드레이크는 태평양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남미 태평양 연안을 북상하면서 페루 리마 인근에서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보물선을 만나게 된다. 그 배에는 25,000 페소의 페루산 금이 실려 있었다. 드레이크는 쉽게 그 배를 나포해 그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을 빼앗았다.

조금 더 가다가 마닐라로 향하는 또다른 스페인 무역선을 발견했다. 카카푸에고(Cacafuego) 호라는 그 배에는 더 많은 보물이 실려 있었다. 그 배도 쉽게 붙잡았다. 카카푸에고 호에는 은 26, 80파운드, 화폐와 장식품 13상자 등 모두 20만 파운드 상당의 재물이 적재되어 있었는데, 이 보물을 옮겨 싣는 데만 5일이 걸렸다고 한다.

고생하며 태평양으로 왔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수 없었다. 보물을 빼앗긴 스페인이 대서양으로 돌아 영국으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북상을 선택했다. 골든 힌드호는 15796월에 캘리포니아 만에 도착했다. 이제 여기서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마젤란 해협이든, 드레이크 해협이든 남미를 돌아 유럽으로 가다가는 스페인 함대에 나포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서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다. 마젤란도 했는데 나는 못할게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는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을 거쳐 믈루카에 도착해 대량의 정향유를 실었다. 곧바로 인도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았고,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15808월 영국 플리머스항에 도착했다. 29개월에 걸친 여행이었고, 페르디난드 마젤란에 이어 두 번째 세계일주였다. 마젤란은 중도에 필리핀에서 살해되었지만 드레이크는 살아서 돌아갔다.

 

마젤란과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항해로 /브리태니카 백과
마젤란과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항해로 /브리태니카 백과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스페인은 당장에 드레이크를 죽이라고 영국을 협박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의 빗발치는 항의를 들은 척도 않고 알현 차 방문한 드레이크와 무려 6시간이나 대화하며 그의 모험담을 들었다.

드레이크는 세계일주를 하면서 약탈한 스페인의 보물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바쳤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파악되지 않는다. 영국의 1년치 세수를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경제학자 J. M. 케인즈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바친 재화의 금액이 영국의 대외부채를 갚고도 남아 동인도회사의 전신인 레반트 회사의 출자금으로 투자되었다고 한다. 영국은 드레이크가 약탈해 번 돈으로 군대를 늘리고 스페인과 한판 싸움을 준비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주고, 플리머스 시장 자리도 내렸다. 스페인과의 감정은 패일대로 패였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해 졌다.

그가 돌아온지 8년후인 1588년에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벌어지고, 드레이크가 무적함대를 격파한다. 이 스토리는 역사적으로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1589년 드레이크는 함선을 이끌고 당시 스페인에 합병되어 있던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공격했지만, 의도하는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1595년 그는 은인자중하던 호킨스와 함께 카리브해 원정에 나섰다. 도중에 호킨스는 병사했다. 드레이크는 파나미 지협을 다시 공격했지만, 스페인군이 철저하게 방어했기 때문에 후퇴를 해야 했다. 그는 15961월 파나마 연해에서 이질로 쓰러져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맺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위키피디아
프랜시스 드레이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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