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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기 보유한 오다 노부나가, 일본 통일…조선, 임란전 조총 전달받아 무시
조총, 동아시아 흔들다…포르투갈인, 일본에 전달
2019. 06. 07 by 김현민 기자

 

1543년 샴(태국)을 떠나 명나라로 향하던 중국선 한척이 일본 규슈 남쪽 다네가섬(種子島)에 표류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루투갈인이 일본에 뎃포(鐵砲)를 건네주었다 화승총의 일종인 조총(鳥銃)이었다.

다네가섬(種子島) 위치 /위키피디아
다네가섬(種子島) 위치 /위키피디아

 

조총이 일본에 전해진 사연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543825,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섬 서남단 가도쿠라 곶에 표착했다. 당시 상황은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가 쓴 <철포기>(鐵砲記)(1606)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중국인으로 왜구의 두목이었던 왕직(汪直)이 중국 닝보(寧波)에서 출항했는데, 승객 가운데에 포르투갈인 2명이 타고 있었다. 출항후 배는 역풍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규슈 가고시마현 다네가섬에 도착했다. 두명의 포르투갈인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들은 그때까지 일본인들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화승총을 가지고 왔다. 길이는 2~4()이었고, 가운데는 뚫려 있고, 아래는 막혀 있었다. 옆의 구멍에 화약을 넣고 작은 총알을 넣으면 바로 발사될 수 있었었다. 총을 발사하면 빛이 번쩍이면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났다. 모두 귀를 막아야 했다.

이 화총(火銃)은 일본인들이 그동안 사용했던 총보다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다. 일본인들은 그 총을 남만뎃포(南蠻鐵砲)라고 불렀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인을 남쪽 오랭캐라는 의미로 남만이라 불렀다.

일본 역사가들은 이때부터 일본에 철포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승식 뎃포(鐵砲) /위키피디아
화승식 뎃포(鐵砲) /위키피디아

 

다네가섬의 영주인 시케토키(惠時)와 도키다카(時曉) 부자는 총의 위력에 감탄하며 비싼 돈을 주고 사고 동시에 제조법과 사용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당대의 장인 야이타 기요사다(八板淸定)에게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장인은 실패했다.

이듬해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에 오자, 기요사다는 그들에게서 다시 제조법을 배웠고, 첫 화승총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야이타 기요사다는 사쓰마 뎃포의 시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총은 머스킨(Musket) 총의 일종으로, 탄약을 앞에서 밀어 넣어 장전하는 전장식 소총이다. 15세기 전반기에 오스만투르크가 먼저 개발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는 1475년대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신에 강선이 없기 때문에 현대의 총기류처럼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어쨌든 일본은 서양에서 머스킷 총을 전달받은지 1년여 만에 자체적으로 기술을 습득해 제작하게 되었다.

 

6세기, 동아시아에는 유럽인들이 진출하면서 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먼저 서양과 접촉한 현지 세력이 분열을 극복하고 국가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 자바의 마타람 왕국, 수마트라의 아체 왕국, 베트남의 레 왕조가 형성됐다. 이들 지배자는 무역 요충지를 장악하고 활발해지고 있는 국제교역을 활용해 큰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와 군사기술을 습득해 주변 세력을 통합해 나갔다. 그리고 부족 중심의 연맹체를 강력한 왕권 하의 절대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일본도 서양의 아시아 진출 시기에 즈음해 통일체로 형성해 나갔다. 16세기 후반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등이 국제 무역세력을 흡수하고, 조총(鳥銃)등 신군사기술을 받아들여 일본을 통일한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하는데 결정적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 새로운 무기는 일본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뎃포(鐵砲)를 처음으로 접한 다네가섬 영주가 모조품을 만들자, 전국 다이묘들이 앞을 다퉈 뎃포 제작에 나섰다. 일부 다이묘들은 뎃포와 그 제작기술을 다른 영지에 전달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독점하려 했다.

일본인들은 꾸준히 조총을 개량했다. 나사를 만들고, 초석을 제조하는 기술을 연구, 개발했다. 정확하게 측정한 화약과 총알을 대나무 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나무통에서 화약과 탄환을 꺼내 신속하게 장전, 발사하는 기법을 개발해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본군은 포르투갈에서 처음 수입했을 때보다 월등히 성능이 우수한 조총을 사용하게 되었다.

대형 화승총을 만드는데도 성공했다. 1573~1574년 경에는 오뎃포(大鐵砲)라는 긴 조총이 등장해 전투에 활용되었다.

 

전국시대 군웅들 가운데 뎃포 제작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무역과 뎃포 제작의 중심지인 사카이(, 오사카) 지역을 장악하면서 전국을 지배할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뎃포 부대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오다 노부나가 /위키피디아
오다 노부나가 /위키피디아

 

오나 노부나가는 삼단법(三段擊)이란 전술을 개발했는데, 병사를 31조로 편성해 사격술이 뛰어난 병사를 사수로 삼고, 다른 두 사람은 총탄과 화승을 책임지도록 했다. 사수가 총을 발사하면, 두 번째 병사에게 총을 받아 화약과 탄알을 장전하고, 세 번째 병사가 발사하기 좋게 방아쇠 등을 조정해 사수에게 전해준다. 삼단격은 당시로선 가장 효율적으로 총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15755월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군대와 나가시노(長篠)에서 붙었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 판도를 결정하는 중대한 전투였다. 다케다 진영엔 당시 최강으로 꼽혔던 기마대가 있었다. 다케다의 기병대가 용맹스럽게 돌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기병대는 오다 군이 설치한 전방의 목책에 걸려 허둥거렸고, 그 배후에 뎃포부대(조총수) 3,000명이 사격을 가해 제압했다. 다케다 기마대는 속수무책으로 12,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섬멸됐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 중세 봉건시대를 마감한 것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도 바꿨다.

부하의 배신에 목숨을 잃은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군대는 15년뒤 임진왜란에서 이 전투방식을 그대로 써먹었다. 조선군과 명나라 정예기마부대는 왜군의 3열 뎃포부대에 무너진 것이다.

 

나가시노(長篠) 전투도 (徳川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나가시노(長篠) 전투도 (徳川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조선에선 임진왜란 2년전인 15903,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 칼 등을 선조에게 진상했다.

그때 정황을 유성룡(柳成龍)<징비록>(懲毖錄)임금께서는 공작새는 날려 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토록 하셨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고 적었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서양의 무기기술을 받아 들이는데 인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양인들과 접촉이 없었는데다 일본을 통해 무기가 들어왔지만, 선조 임금은 거덜떠 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화의 질서에서 변방국이 진상하는 무기를 얕잡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한번은 그 무기를 테스트해보아야 했지 않았을까. 1년이면 개발해 다가올 전쟁에서 활용할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당대 조선 조정에선 아무도 그 무기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200년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신무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조선의 군 수뇌는 조총의 위력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직전에 신립(申砬) 장군과 나눈 대화를 <징비록>에 적었다.

 

41일(1592년),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물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것이오. 그래, 적을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자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디까.?”

 

몇 달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가 방어선을 구한 신립 장군의 조선군은 탄금대(彈琴臺) 전투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괴멸되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던 신립은 강물에 투신해 자결했다.

 

나가시노(長篠) 전투 재현 /위키피디아
나가시노(長篠) 전투 재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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