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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 바라노프가 모피 찾아 도착…주노 이전의 알래스카 주도
모피로드 종착지, 알래스카 싯카
2022. 02. 13 by 박차영 기자

 

러시아 제국이 동쪽으로 진출하게 된 동기는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욕보다는 상업적 이익 때문이었다. 16세기 유럽엔 모피 열풍이 불었다. 소빙기의 혹한이 유럽대륙에 닥쳐 왔고, 부유층들은 모피를 부드러운 금이라 부르며 부()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러시아 차르는 슬라브족 유목민 코사크족을 앞세웠다. 코사크 모피상인들은 시베리아 부족과 협상을 벌였다. 협상의 목적은 러시아의 안보가 아니라 부를 긁어내는 것이었다. 현지 부족들은 코사트에게 모피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코스크 상인들이 모피를 찾아나서면서 시베리아에 길을 냈다. 그 길을 모피로드(fur road)라고 한다. 윤성학저 모피로드에 따르면 모피로드는 우랄산맥 너머 토볼스크에서 시작해 튜멘, 옴스크, 예니세이스크, 일림스크, 이르쿠츠크, 야쿠츠크로 연결된다. 이어 야쿠츠크에서 콜리마강을 넘어 아나디르반도, 오호츠크해, 캄차카 그리고 베링해를 넘어 알래스카까지 간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싯카(Sitka)까지 갔다. 싯카가 모스카바에서 시작되는 모피로드의 종점인 것이다.

 

알래스카 싯카의 위치 /위키피디아
알래스카 싯카의 위치 /위키피디아

 

18세기말 러시아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싯카에는 틀링깃(Tlingit)족이 살고 있었다. 그곳은 양질의 모피를 제공하는 해달(sea otter)의 보고였다. 1799년 러시아 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n Company)의 지배인 알렉산드르 바라노프(Alexandr Andreyevich Baranov)가 싯카에 내려 차르에게서 식민지 개척 허가장을 받았다. 바라노프는 그곳을 자신의 고향 아르한겔스크를 본따 노보아르헨겔스크(Novo-Arkhangelsk)라고 했다. ‘novo’는 러시아어로 새로운’(new)이란 뜻이다. 러시아는 바라노프를 아메리카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하고 싯카에 정착촌을 세우고 모피거래에 나섰다.

원주민인 틀링깃족이 러시아 이민자에게 반발했다. 이 종족은 북아메리카의 바이킹이라 불리며 전투력아 강한 것으로 유명했다. 1802년 틀링깃족이 싯카를 점령하고 러시아인들을 살해하고, 일부를 인질로 잡혔고, 일부만이 간신히 탈출했다. 원시적 무기를 보유한 틀링깃족은 현대식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을 쫓아낸 것이다. 총독 바라노프는 인질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1만 루불이라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2년후인 18048월 바라노프는 해군함정 네바(Neva)호를 이끌고 싯카를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다. 틀링깃족은 함포사격엔 버티지 못했다. 러시아인들은 싯카를 다시 장악했고, 그곳을 러시아 아메리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싯카의 틀링깃족 /위키피디아
러시아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싯카의 틀링깃족 /위키피디아

 

싯카에 본거지를 둔 러시아 상인들은 모피 사냥을 위해 알루샨 열도로 모피 원정에 나섰다. 알루샨 열도 주변에는 바다표범과 바다사자, 고래, 대구, 넙치 등 각종 물고기가 풍성했고, 해달도 많이 서식했다. 바라노프는 원주민들의 해달 사냥을 대규모 사업으로 전환시켰다. 알루샨 열도의 알류트족은 바이다르카라는 카약을 타고 해상 모피원정에 나섰다. 바라노프는 무려 700척의 바이다르카 카약으로 선단을 조직해 해달 사냥에 나섰다.

 

북태평양 해달 서식지 /위키피디아
북태평양 해달 서식지 /위키피디아

 

19세기 알래스카의 노보아르한겔스크는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는 모피와 함께 중국산 옷감이 거래되었다.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건설되고, 영국과 프랑스 선박이 모피 교역을 위해 이곳에 왔다. 이곳에서 생산된 모피는 중국 광저우까지 실려갔다.

바라노프는 모피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는 깃카의 높은 언덕에 집무실을 만들었는데, 그곳을 바라노프의 궁전이라고 했다. 이 건물은 1894년에 소실되었으나, 그곳에는 만찬장, 도서관, 음악실, 예술품 전시장도 있었다고 한다. 또 궁전에는 연회장도 있었는데, 바라노프는 거래처 손님들을 이 곳에 불러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바라노프는 알래스카를좋아했다. 그는 알류트족 여자를 아내로 맞아 3명의 자녀를 두었다.

 

러시아 지배시기의 노보아르한겔스크(싯카) /위키피디아
러시아 지배시기의 노보아르한겔스크(싯카)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1867년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미국에 매각했다. 크림전쟁 패전에 따른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산업혁명으로 인해 값싼 면직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모피의 수요가 줄어들어 알래스카의 경제적 효과가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국이 그 땅을 노린다는 사실이다. 주인이 아닌 자가 남의 땅을 내 땅이라고 주장하던 제국주의 시절에 힘이 주인이었다. 러시아는 미국이 알래스카를 달라고 하기 전에,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몇푼이라도 받고 파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인들이 알래스카를 차지한 후 러시아식 이름인 노바아르한겔스크를 원주민이 부르던 싯카로 바꾸었다.

알래스카가 미국으로 팔리고 난후 그곳에 골드러시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모피보다 금에 눈이 필렸다. 금광도시 주노(Juneau)에 사람이 몰렸고, 미국은 1906년 알래스카의 주도를 싯카에서 주노로 변경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Sitka, Alaska

Wikipedia, Maritime fur trade

Wikipedia, 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윤성학, 모피로드, 알래스카 싯카(2021. 9. 27), 한국외국어대하교 러시아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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