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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총리, 세 번 대통령 출마…오렌지 혁명 주인공, EU 가입 지지
우크라이나의 잔다르크 티모셴코
2022. 02. 17 by 박차영 기자

 

율리아 티모셴코(Yuliya Tymoshenko, 1960~ )는 우크라이나에서 두 번 총리를 역임했고, 대통령 선거에 세 번 출마한 여성 정치인이다. 여성 총리로는 우크라이나에서 처음이며, 러시아를 포함해 구소련에서 독립한 15개 국가에서도 처음이다. 현역 6선 의원이기도 하다. 그녀가 속한 정당은 우크라이나 조국동맹(Batkivshchyna)이다. 그녀는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NATO 가입을 지지하고, 러시아가 중심이 된 유라시아 관세동맹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2005년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에서 3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율리아 티모셴코(2018) /위키피디아
율리아 티모셴코(2018) /위키피디아

 

율리아 티모셴코는 196011월 우크라이나의 중부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름은 율리아 흐리햔(Yulia Hrihyan)인데, 아버지는 라트비아 출신으로, 율리아가 아기였을 때 처자식을 버렸다. 그녀는 올렉산드르 티모셴코와 결혼해 남편의 성으로 바꿨다.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공대를 다니며 기계 자동화와 원격조정 분야를 전공했다. 그녀는 공학 이외에도 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는 경제학과 공학을 배운 커리어를 십분 활용했다. 율리아는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에 있는 미사일 제작회사에 취직했다가 198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올라타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율리아는 남편 올렉산드르(Oleksandr)에게서 5,000 루블을 빌려 비디오 대여점 테르미날(Terminal)을 차렸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영화배급업자였다.

율리아는 비디오 대여점에 만족하지 않고, 1991년 시댁의 돈을 활용해 우크라이나 석유회사’(The Ukrainian Petrol Corporation)를 차렸다.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무렵이었다. 티모셴코 회사는 러시아에서 천연가스를 들여와 농촌에 공급했다. 부부는 사업을 확장시켜 1995년에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에너지회사(UESU, United Energy Systems of Ukraine)로 키우고, 율리아가 사장이 되었다. 당시 율리아는 가스 공주"(gas princess)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러시아 가스회사인 가스프롬(Gazprom)과도 거래했고, 이권 확보를 위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벌였다고 한다.

 

2008년 4월 키예프를 방문한 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티모셴코 /위키피디아
2008년 4월 키예프를 방문한 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티모셴코 /위키피디아

 

율리아 티모셴코가 정치체 발을 들여놓은 때는 1996년이다. 그녀는 중부 보브리네트에서 무려 92.3%의 득표율로 라다 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나이는 36, 여성기업인으로 성공하고 개혁적이고, 게다가 미인인 그녀는 우크라이나 정계에 스타가 되었다.

정치에 뛰어든지 4년차가 되던 1999년에 39살 율리아는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총리 내각에서 에너지 분야를 담당하는 부총리에 올랐다. 에너지 기업의 경영자가 정책책임자가 되면서 이해충돌의 소지가 커졌으며, 그런 의심이 정치소용돌이에 휘말려 20008, UESU 대표를 맡고 있던 남편 올렉산드르가 구속되었다. 대통령이던 레오니드 쿠치마와 총리 유셴코는 율리아를 정부에서 내쫓았다. 유셴코와 티모셴코가 대립하는 첫 번째 케이스였다.

 

2009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티모셴코 /위키피디아
2009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티모셴코 /위키피디아

 

하지만 쿠치마 대통령이 유셴코 총리를 해임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계속하자, 티모셴코는 2001년부터 쿠치마를 반대했다. 2004년 대선에서 유센코와 손을 잡고 러닝메이트로 뛰었는데, 2차 결선투표에서 유셴코가 빅토르 야누코비치에게 패배하자 선거부정 사례를 대대적으로 폭로하면서 민중시위를 이끌었다. 티모셴코는 정부청사와 대통령 집무실 봉쇄, 총파업 등의 강경 대응을 펼쳐 국내외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마침내 재선거가 치러져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티모셴코는 '오렌지 혁명'을 이끈 여성으로, '우크라이나의 잔다르크'라는 별칭을 얻었다. 20052월에는 유시첸코의 대통령 당선에 이바지한 공으로 제10대 총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셴코와 티모셴코의 동거정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둘 사이에 불화가 커져 유셴코는 9개월만에 티모셴코를 총리에서 해임했다.

20063월 총선에서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이 최대의석을 차지했다. 유셴코는 정적인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셴코와 야누코비치의 동거도 오래가지 못하고 20074월 유셴코는 의회를 해산했다. 새로 치러진 총선에서도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티모셴코가 연정 구성에 성공하며 총리 자리를 다시 꿰어찼다. 그녀는 200712월부터 20103월까지 제13대 총리를 역임했다. 총리 시절이던 20097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을 접견했다.

극심한 정치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2010년 대선이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 유셴코는 5.45%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고, 야누코비치와 티모셴코가 결선투표로 가게 되었다. 결선투표에서 야누코비치는 49%를 얻어 45.5%를 얻은 티모셴코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야누코비치는 집권하자 2011년 정적인 티모셴코를 권력남용 혐의로 기소했고, 그녀는 7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러시아와의 가스 배관 계약 시 우크라이나의 국익을 훼손시켰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2014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로마이단 시위대에 의해 축출되자, 정적이었던 티모셴코는 의회 결의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녀는 3년간 옥살이를 했다.

율리아 티모셴코는 2014년 대선에 출마해 12.8%의 득표율로 2위에 머물러 54.7%를 얻은 페트로 포로셴코에 패배했다. 2019년 대선에도 출마해 13.4%의 지지를 얻었으나 3위에 그쳐 결선투표에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현 대통령을 지지했다.

율리야 티모셴코는 러시아어 사용자이다. 그러나 러시아 언론과 인터뷰할 때에는 러시아어 사용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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