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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사라고사 조약 체결…향료열도 놓고 치열한 싸움, 아시아판 토르데시야스 조약
포르투갈-스페인, 동아시아 배분하다
2019. 06. 09 by 김현민 기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가들이 동과 서로 본격적인 해양 탐험에 나서면서 1494년에 두 나라가 체결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은 허점이 발견되었다. 그 무렵, 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 서로 금긋기 싸움을 벌이면서 선 하나만 그으면 평평한 지구의 동과 서를 반씩 나눠 먹을 줄 알았다. 이 조약으로 두 나라는 포르투갈 국왕 개인 소유인 카보베르데(Cabo Verde) 서쪽으로 370 레구아(1,500km) 되는 지점에서 남북으로 경계선을 그어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했다.

당시 천문학과 지리학은 수준이 낮았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은 1543년이고,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 포기 서약을 한 것은 다음 세기인 1616년이다. 대항해 시기 초기에 교황은 물론 이베리아 반도의 두 왕국은 지구를 평면으로 생각했다.

학문적 규명은 현실의 경험보다 늦을 때가 많다. 이미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국왕의 명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1497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다녀 갔다. 게다가 스페인 사람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부하는 1519~1522년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과 사라고사 조약(1529)의 경계선 /위키피디아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과 사라고사 조약(1529)의 경계선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이 동쪽으로 인도, 말레이 반도, 중국을 거치면서 아시아로 진입했고, 스페인은 서쪽으로 돌아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아시아로 왔다. 두 나라는 아시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들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맹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평형하게 남북으로 그은 금으로는 아시아에서 경계를 확인하기 어려워 졌다. 그들은 아시아에 엄청난 무역 이문이 나는 것을 알았다.

1498년 바스쿠 다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향신료를 찾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도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아랍인들의 안내를 받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들은 진짜 인도를 발견했다. 그 무렵 인도는 유럽보다 풍요로운 나라였다. 향신료 이외에도 캘리컷의 무명은 매우 고급품이어서 유럽인들이 한눈에 반했다. 인도에서 가져온 무명이 유럽의 면직산업을 일으켰고,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됐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 일행은 향신료와 무명을 가득 싣고 2년만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이들은 동양에서 가져간 물건으로 6,000%, 60배의 이문을 남겼다. 출항할 때 선원 170명중 3분의1도 못되는 55명이 살아 돌아갔지만, 죽은 자의 목숨 값을 교역을 통해 톡톡히 받아낸 것이다. 리스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세에 지중해 무역에서 향신료를 거래해서 얻는 이윤율은 40% 정도였다. 그것도 높은 이윤율이었다. 동양과의 거래에서 수십 배의 이윤이 난다는 소식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모험가와 모험자본을 부추겼다. 돈 냄새가 나면 투기가 형성된다. 험난한 바다를 거쳐 동양의 산물을 손에 쥐었을 때 크게 한탕 한다는 대박심리가 유럽을 흔들었다. 포르투갈은 1505년 인도 고아에 총독을 두었고, 1511년 실론(스리랑카)과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정복했다. 이어 1515년 페르시아만 호르무즈를 점령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희망봉을 지나 동아시아에 이르는 대항로를 구축했다. 포르투갈은 중국 광동성의 거대한 비단시장, 말라카의 향신료 시장을 독점하며 거대한 부를 형성했다.

이때 포르투갈에 경쟁자가 나타났다. 마젤란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3년간의 기나긴 항해를 거쳐 15214월 필리핀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이 동쪽으로 항해해 동아시아에 왔지만, 스페인은 서쪽을 돌아 동아시아에서 만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무역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두 나라는 이제 아시아에서 중계기지와 식민지를 형성하게 위해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동남아의 향신료와 중국의 비단이 목적이었다.

 

몰루카 열도 지도 /위키피디아
몰루카 열도 지도 /위키피디아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동아시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시아를 놓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새로운 금을 그어야 했다.

1524년 두 왕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모임의 장소는 아라곤의 수도 사라고사(Zaragoza)였다. 양측에서 천문학자, 지리학자 각 1명과 항해사 3명으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회의의 목적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그은 금의 반대편에 또다른 금을 그어 세계를 반분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지리학과 천문학으로 협상을 했더라면,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그은 경도의 180° 반대편에 그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 그럴만한 학문적 지식이 없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포르투갈 대표단이 사라고사의 거리를 지나갈 때 한 소년이 그들을 가로막고 세계를 똑같이 분할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대표단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소년은 한 대표의 등 뒤로 돌아가 척추와 엉덩이 갈라진 곳에 금을 죽 그으며,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태평양 탐험로 /위키피디아
스페인의 태평양 탐험로 /위키피디아

 

협상의 초점은 현재 인도네시아령인 몰루카 열도(Moluccas islands)였다. 그 열도에서는 값비싼 향료들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향료 열도라고도 불렸다.

두 나라는 몰루카 열도를 자기네 영역으로 표시된 지도를 그려 협상 테이블에 내놓았다. 수차례 회담이 열렸지만, 타결되지 않았다. 커다란 이권을 놓고 타협이 불가능했다.

협상이 몇 년째 지연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 몰루카를 탐험했다.

먼저 포르투갈이 1525~1528년 사이에 원정대를 보내 인도네시아 열도를 거쳐 뉴기니, 태평양 캐롤라인 열도까지 탐험했다. 이에 뒤질세라 스페인도 1525~1526년에 멕시코 총독 코르테스의 명령으로 원정대를 보내 몰루카와 태평양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꽉 막힌듯한 협상은 의외의 일로 인해 타결을 보게 되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의 여동생 카탈리나와 결혼하고, 카를로스 5세가 주앙 3세의 여동생 아사벨라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 왕실은 포르투갈 왕실과 겹사돈이 되면서 타협점을 찾았다.

결론은 포르투갈에게 유리하게 결정되었다. 몰루카 열도를 포르투갈에게 넘겨주는 방향에서 선을 그었던 것이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된지 35년 후인 1529년에 두 나라는 마침내 아시아의 경계선을 정하는 사라고사 조약(Treaty of Zaragoza)을 체결한다. 사라고사 조약이 그은 금에 의하면 콜럼버스가 그렇게 찾아 헤메던 지팡구(일본)와 마젤란이 죽은 필리핀도 포르투갈의 영역이 된다. 게다가 스페인은 필리핀에 이미 자국 정착자들이 살고 있음에도 포기했는데,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필리핀에서 멕시코까지 가는 항로를 발견하지 못해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대 지리학을 보면 토르데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이 차지한 세계는 전체 경도 360°에서 191°의 영역인데 비해, 스페인의 영역은 169°, 포르투갈의 영역이 22°나 더 가져갔다.

스페인으로선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입장에서 이 조약을 사라고사의 항복’(Capitulation of Zaragoza)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가 포르투갈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데는 이유가 있다. 스페인은 그때 프랑스, 로마 교황청, 베네치아, 밀라노의 연합세력과 꼬냑 연맹 전쟁’(War of the League of Cognac)을 치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로부터 전쟁자금을 얻어쓸 필요가 있었다. 포르투갈은 몰루카 열도를 얻는 대신에 소정의 돈을 카를로스 5세에게 주었다고 한다.

필리핀은 이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에 귀속되었는데, 조약 문구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그후 스페인은 슬금슬금 필리핀에 이민자를 보냈고, 1542년 공식적으로 식민지로 만든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처사가 사라고사 조약에 위반됨을 알고 있었지만,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필리핀 섬에는 향료가 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시아 땅을 놓고 유럽 국가들이 제멋대로 주고받고 한 것이다.

포르투갈은 사라고사 조약으로 아시아의 대부분 영토를 소유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1580년 포르투갈에 왕위계승 분쟁이 벌어지면서 스페인 왕실이 포르투갈 왕위를 이어받아 두 나라를 합병했다. 포르투갈이란 나라는 60년간 역사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뒤늦게 아시아 지역에 눈독을 들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물론 사라고사 조약도 무효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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