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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야기
평화시엔 온순하고 복종적이지만 외침 또는 탄압 받으면 집단으로 저항
푸틴의 오판…우크라이나인에 숨은 코사크 기질
2022. 03. 02 by 박차영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의 가장 큰 오판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엄청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지난해 여름 크레믈린궁 홈페이지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푸틴은 키예프 공국 때부터 두 나라가 하나였으며, 우크라이나를 만들어준 나라가 러시아였다고 설파했다. 그는 이번 전쟁을 일으키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이 두손 들어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이 전쟁을 도발한지 1주일이 지나 전황은 기대와 달리 흘러 갔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은 의외로 강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적 자각심을 일깨웠다. 젊은이들은 침략군의 탱크를 막아섰고, 총을 잡았다. 파죽지세로 남부 초원을 점령하려던 푸틴의 계획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호르티치야 섬에 있는 자포리지야 코사크 박물관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호르티치야 섬에 있는 자포리지야 코사크 박물관 /위키피디아

 

푸틴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러시아인과 같은 슬라브족이고, 그리스 정교를 믿고 키릴 문자를 공유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16세기 이후 러시아와 다른 역사과정을 걸었고, 그 뿌리에는 코사크(Cossacks)라는 집단이 존재한다. 러시아어로는 카자크로 발음되며, 카자흐스탄의 민족인 카자흐와 구분된다.

코사크는 중세 유럽의 기사, 근대이전 일본의 사무라이와 비견되는 동유럽 초원의 무사조직이었다. 15세기말 땅을 빼앗긴 동유럽 농민들이 흑해로 빠져나가는 드네프르강과 돈강 하류에 몰려들어 무장세력을 형성했다. 그들 중에는 슬라브족도 있었고 타타르족도 있었다. 그들은 초원의 지배자였던 폴란드-리투니아 연합왕국 또는 모스크바 공국에 소속되지 않고 차치적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우크라이나의 뿌리는 드네프르강의 호르티치야(Khortytsia) 섬에 요새를 건설한 자포리지야 코사크(Zaporozhian Cossacks). 이 섬은 길이 12.5km, 2.5km로 여의도의 8배나 되는 하중도(河中島). 17세기초 그들은 이 곳을 은거지로 삼아 지배자였던 폴란드에 저항했다.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출발한 코사크의 일부는 폴란드에 밀려 돈강 유역으로 이동했고, 이들이 돈 코사크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 초원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초원 /위키피디아

 

우리나라에 소개된 헐리웃 영화 대장 부리바는 폴란드에 저항하는 자포리지야 코사크의 스토리다. 율 브리너 주연의 이 영화는 우크라이나 코사크 출신의 작가 니콜라이 고골이 쓴 원작 타라스 불바’(Taras Bulba)를 개작한 것으로, 코사크의 생활과 풍습, 전통을 엿보게 한다.

코사크는 러시아 제국에도 저항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텐카 라친(Stenka Razin, 1630~1671))은 돈강과 볼가강 유역에서 활약한 돈 코사크(Don Cossacks). 그를 기다리는 러시아 민중의 노래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 강물 위에/ 스텐카 라친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드높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 강은 흐르고/ 잠을 깨인 스텐카 라친 외롭구나 그 얼굴

1773~1775년 농민반란을 일으킨 푸가초프(Pugachyov)도 돈 코사크다. 차르 치하에 신음하던 러시아 민중들은 스텐카 라친가 푸가쵸프를 의적으로 묘사했다. 코사크 반란자들은 러시아 민중의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코사크(1890) /위키피디아
악기를 연주하는 코사크(1890) /위키피디아

 

코사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코카서스 등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러시아제국의 팽창기에 차르에게 충성하기도 했다. 코사크는 차르를 위해 모피 사냥에 나섰고, 시베리아에 이어 알래스카까지 진출했다.

시베리아를 개척한 전설적 영웅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Yermak Timofeyevich)는 돈 코사크의 헤트만이었다. 그는 1581년 코사크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해 이르티시 강변에서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 차르의 명을 받은 코사크 부대는 1639년 태평양에 다다랐고, 1648년 세묜 데즈네프(Semyon Dezhnev)가 이끄는 코사크 집단이 5척의 배를 타고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예르마크가 죽은지 60년만에 러시아는 코사크를 앞세워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진출한 것이다. 코사크는 1689년 아무르강에서 청나라와 충돌해 국경을 정하는 조약(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코사크는 항상 배신할수 있는 무리였다. 그들은 평화 시에는 대단히 순박한 사람들이다. 집단에 복종하고 생업에 충실하며 산다. 하지만 외부의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은 저항했다. 폴란드나 러시아, 타타르의 침공을 받거나 핍박을 받을 때 그들은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러시아와 폴란드 지배자들의 눈에 코사크는 늘 의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배자에게 비친 배신은 피지배자에겐 자구책이었을 뿐이다.

코사크는 족장을 선출했다. 족장 헤트만(hetman)이 패전하거나 조직에 위해를 가할 경우 쫓겨났다.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더라도 집단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그들은 헤트만을 중심으로 단결했고, 헤트만이 반역하면 쫓아냈다.

2014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EU가입에 서명을 포기했을 때 우크라이나인들은 유로마이단 혁명을 일으켜 국가수반을 쫓아냈고, 올해 러시아가 침공할 대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우크라이나인의 기질은 코사크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다.

 

푸틴은 5,000자나 되는 자신의 역사논평에서 1654년 페레야슬라브 회의에서 코사크의 헨트만이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러시아 차르에 복종할 것을 결의한 때부터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어느 누구도 코사크를 지배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흐멜리츠키가 폴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스크바의 차르와 손을 잡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침략과 전쟁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민족이 일제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자각된 것처럼 우크라이나도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서부터 민족의식을 일깨우게 되었다. 그 이후 고양된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의식이 러시아군이 재침한 지금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8년전 푸틴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크림 반도를 접수했다. 푸틴은 이번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이 맥없이 무너질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Cossacks

Wikipedia, Zaporozhian Sich

Wikipedia, Khortytsia

TheConversation, Would Vladimir Putin actually be able to rule Ukraine?

UkraineWorld, Why Are Cossacks Key to Understanding the Ukrainian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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