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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야기
아일랜드 수도승이 초기 정착…바이킹족 인골푸르가 첫 이민
바이킹의 신세계①…’숲의 나라‘ 아이슬란드
2022. 03. 14 by 박차영 기자

 

서양사에서 8~10세기는 바이킹의 시대였다. 북유럽의 항해자들이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하고 점령하던 시절이다. 지금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 살던 해적들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그들보다 선진화된 나라들을 침략했다. 북유럽의 바이킹들은 그것도 모자라 신대륙 개척에 나섰다. 그들은 북극권의 페로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캐나다 북부지역을 탐험했다. 그들은 콜럼버스에 앞서 수백년 전에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9세기 바이킹들의 아이슬란드 탐험로 /위키피디아
9세기 바이킹들의 아이슬란드 탐험로 /위키피디아

 

바이킹들이 개척한 대표적인 신세계가 아이슬란드다. 아이슬란드는 면적이 102,000으로 대한민국보다 약간 넓지만, 인구는 37만명에 불과하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 레이캬비크와 그 주변에 살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존재는 고대 그리스인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BC 4세기에 그리스 탐험가 피테아스(Pytheas)는 백야가 지속되고 있는 곳을 다녀와 그곳을 툴레(Thule)라고 했다. 지리학자들 사이에 피테아스가 다녀온 툴레가 아이슬란드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파로제도 우표 /위키피디아
파로제도 우표 /위키피디아

바이킹 이전에 아이슬란드를 방문한 사람은 아일랜드의 카톨릭 수도승들이었다. 이들은 '파파르‘(Papar)라고 불리는 은자들로, 셔틀랜드나 페로 제도, 오크니 제도 등 북유럽의 여러 섬들에도 정착했다. 이들은 대략 서기 7세기경에 아이슬란드의 동굴에서 수도하다가 9세기경 세기경 노르웨이인들이 들어오면서 그들과 부딪치기 싫어서 섬을 떠났다고 한다. 오늘날 아이슬란드 동쪽 해안의 파페이(Papey) 섬은 이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아이슬란드 역사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바이킹은 나도드(Naddoddr)이며, 시기는 825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페로제도를 거쳐 아이슬란드에 발을 디뎠는데, 그 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갔다. 나도드는 그 섬을 스노란드(Snowland)라고 불렀다.

이어 860년경에 가르바르 스바바르손(Garðar Svavarsson)을 선장으로 하는 스웨덴인들이 폭풍에 밀려 스노란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섬을 일주하고 이 섬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섬에서 겨울을 보내고 노르웨이로 돌아가 아름다운 풍경과 무성한 삼림, 광활한 목초지, 풍부한 어장이 있는 섬을 발견했다고 자랑했다.

가르바르의 탐험 소식을 듣고 흥분한 사람은 노르웨이인 플로키(Hrafna-Flóki Vilgerðarson)였다. 그는 스노란드를 목표로 항해한 최초의 바이킹이었다. 그는 노르웨이를 출발해 셔틀랜드 제도, 페로 제도를 거쳐 스노란드에 도착했다. 그곳은 가르바르의 주장처럼 물고기가 풍부했고, (bay)가 아주 많았다. 플로키도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피요르드에서 유빙을 발견하고, 섬 이름을 이이슬란드(Iceland)로 명명했다.

 

인골푸르 아르나르손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해 기둥을 세우라고 있다. /위키피디아
인골푸르 아르나르손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해 기둥을 세우라고 있다. /위키피디아

 

아이슬란드에 최초로 정착한 바이킹은 인골푸르 아르나르손(Ingólfur Arnarson)이다. 그가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시기는 870년대로 추정된다.

인골푸르는 노르웨이의 부족장으로 간주되는데 그곳에서 유혈출돌에 연루되어 도주해야 할 운명이 되었다. 그는 가르바르와 플로키가 다녀갔다는 아이슬란드로 가서 정착하기로 했다. 그의 탈출에 동생 요레이프르(Hjǫrleifr)가 동참했다.

인골푸르는 배에 두 개의 나무기둥을 싣고 떠났다. 그는 아이슬란드 해안에 도착해 기둥을 바다에 띄워 보내고, 부하 두 명을 내려 기둥을 찾게 했다. 나무 기둥이 닿은 곳에 그들은 정착하기로 한 것이다.

동생 요레이프르는 아일랜드에 들러 현지인들을 잡아 끌고 왔다..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노예로 부려먹었다. 요레이푸르는 포악했다. 아일랜드의 노예들은 그의 잔혹성을 이기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켜 요레이푸르를 죽이고 아이슬란드 본섬에서 떨어진 섬으로 도망쳤다.

인골푸르는 동생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일랜드인들이 도주한 섬으로 쫓아가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노르웨이인들은 아일랜드인을 웨스트맨(Westman)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섬은 베스트만나에이야르(Vestmannaeyjar) 제도가 되었다.

 

874년께 인골푸르의 부하는 바다에 던져진 기둥이 어느 해안에 도착한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아이슬란드 남동쪽으로 수초가 무성했다. 그들은 촌락을 세우기 위해 그곳으로 갔는데, 바닷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그 곳에 누군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펴보았는데, 수많은 온천에서 뿜어 나오는 수증기와 돌 틈에서 나오는 물기둥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들은 그곳을 연기가 피어나는 만이라는 뜻으로 레이캬비크(Reykjavík)라고 했다. 지금 아이슬란드의 수도다.

 

아일랜드의 숲 /Skograektin
아일랜드의 숲 /Skograektin

 

바이킹족이 처음 아이슬란드에 정착했을 때 그곳엔 수풀이 무성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는 북극권에 가까이 있지만 난류가 흘러 러시아 북부보다는 혹한은 아니다. 초기 탐험가들은 스노란드, 아이슬란드라고 섬의 이름을 지었지만 그들은 그곳에 숲이 무성했다는 보고도 남겼다.

과학자들은 바이킹 정착 초기인 1,150년 전에 아이슬란드의 25~40%가 숲으로 덮여 있었을 것이란 연구를 내놓았다. 자작나무와 관목이 우거진 냉대림을 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착자들이 늘면서 숲이 붕괴되었다. 그들은 겨울을 보내기 위해 목초지를 개간하고, 주택을 짓고, 겨울철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남벌했다. 때문에 숲이 사라져 갔다.

아이슬란드에선 바이킹 시대 이전의 숲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Settlement of Iceland

Wikipedia, Ingólfr Arnarson

History of forests in Ic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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