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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스페인령 필리핀, 중국과 밀무역으로 총과 화약 구입…과대망상적 세계관 형성
도요토미, 무역거래로 전쟁물자 구입하다
2019. 06. 11 by 김현민 기자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가신으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 침공에서 선봉경쟁을 벌였던 무장이다. 그는 일본 규슈의 히고(肥後, 구마모토)의 영주였다.

가토는 쇼군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정벌을 준비하라는 명을 받고 전비를 마련했다. 그의 전비 마련 과정을 보자.

가토의 본거지인 구마모토(熊本) 인근에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가 있었다. 가토 휘하의 상인들은 나가사키를 통해 필리핀 루손섬과 중국 남해안에 무역거래를 했다.

루손섬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멕시코 아카풀코와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그당시 가장 값 나가는 교역품은 은()이었다.

일본학자 나카지마 가쿠쇼(中島樂章)의 연구에 따르면, 가토는 조선침공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 1년 전인 1591년에 은과 밀 20만근(120)을 나가사키에 팔라고 지시한다.

당시 루손섬에 거주하던 스페인인들은 주식인 밀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멕시코에서 밀을 가져 오자니, 부피도 컸고 태평양을 건너면서 부패하기 쉬웠다. 중국에서 밀을 구입하려 했지만, 중국은 식량난으로 밀이 부족했다고 반출하지 않았다. 결국 스페인은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가토는 영지에서 생산된 밀과 은을 루손섬에 팔았고, 그 밀은 루손섬의 스페인인들에 의해 소화되고 남은 것은 중국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주력군이었던 가토 군은 구마모토 영지에서 확보한 밀과 고율의 세금을 걷어 새들인 은을 루손섬에 가져가 스페인 상인에게서 조총과 실탄, 화약을 사왔다는 게 일본 학자들의 연구결과다.

 

가토 기요마사의 거점이었던 구마모토성 /위키피디아
가토 기요마사의 거점이었던 구마모토성 /위키피디아

 

중국의 명()나라는 1560년대에 남해안에 민간무역을 일부 허용했다. 그러자 푸젠(福建)성 상인들이 아시아 해역에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하지만 명은 왜구에 대한 공포를 잊을수 없어 일본인들의 거래는 금지했다. 일본 상인들은 중국에 직접 교역을 할수 없었지만, 푸젠성 상인을 통해 거래를 했다. 규슈 상인들도 중국과의 밀무역을 통해 부를 창출했다.

1571년 포르투갈이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에 중계무역을 시작했다. 동시에 푸젠성 상인들이 조정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규수로 건너가 일본 은을 수입해 명 조정에 팔았다.

푸젠성 상인들은 필리핀 루손섬도 방문했다. 그들은 규슈, 루손섬을 잇는 삼각 무역에 전개했다.

동아시아에 무역거래가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가토의 지시로 규슈의 일본상인들이 해외무역 주자로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대초에 루손-규슈 무역이 증가했다. 일본은 은을 수출하고 필리핀에서 금과 중국산 생사를 수입했다. 남미산 은 도입이 급증하면서 일본의 루손 수출품은 은에서 밀과 같은 소비재로 바뀌었다. 가토는 은과 밀을 팔아 루손섬의 스페인 상인으로부터 조총과 실탄제조용 납, 화약등을 대량 구매한 것이다.

 

16~17세기 남아시아 무역로 (大日本読史地図) /위키피디아
16~17세기 남아시아 무역로 (大日本読史地図) /위키피디아

 

도요토미는 부유한 상인을 부하로 두었다. 전쟁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당시 긴키(近畿) 지방 최대무역항인 사카이(, 오사카)를 차지한데 이어 대륙의 출입구인 하카다(博多, 후쿠오카)를 점령했다.

일본열도의 군벌을 제압한 도요토미는 바다의 세력을 흡수하러 나섰다. 그는 전국시대에 쇼군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밀무역과 약탈을 일삼던 해적 해체령을 내렸다. 임진왜란 4년전인 1588,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열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해상 사무라이 집단을 겨냥해 해적정지령(海賊停止令)을 내렸다.

당시 해적(왜구)은 해안지역에서 호족 성격을 띠었다. 다이묘들이 해적들에게 해상영지를 주었고, 이들은 밀무역에 종사하거나, 조선과 중국의 해안지역과 상선을 약탈하기도 했다.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권력이 분산될 때 해적집단은 정치적으로 독립하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해적행위 금지령으로 전국의 해적들은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하거나, 무장을 해제하고 일반 백성으로 전환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 조치로 왜구는 사라진다.

도요토미가 중국과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의 침략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자애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해적을 해체시킨 것은 크게 두기자 목적으로 보인다.

첫째는 해적들을 정규 수군으로 전환시켜 장차 조선 또는 중국을 침공하기 위한 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왜구의 무역권을 장악해 중앙정부의 세수를 늘리려는 목적이다.

도요토미의 다음 목표는 조선과 중국이었다. 그는 일단 조선과 중국에 무역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에 대해 해금(海禁) 정책을 풀지 않았고, 조선도 삼포왜란 이후 일본과 중단한 거래를 재개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망상적 판단을 내린다. 1591년 도요토미는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등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한다. 조선으로선 들어줄수 없는 요구였다.

조선을 침략한 직후 도요토미가 관백(關白)인 히데츠구(秀次)에게 보낸 문서에서 천하 계획을 밝힌다.

명의 수도 베이징에 천황을 옮겨 수도로 삼고, 수도 근처의 10개국을 직할지로 진상하고, 귀족들에겐 토지세 징수를 열배 증가시킨다. 히데츠구를 명의 관백으로 삼아 수도근처의 100여개 나라를 준다. 나는 닝보(寧波)를 거소(居所)로 하며, 조선의 수도에는 이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나 누구를 이주시키고, 조선 국왕은 체포해 일본에 끌고 온다.”

도요토미는 조선과 명, 류큐, 고산국(대만) 필리핀(스페인령), 인도(포르투갈령)에 외교문서를 보내 일본은 통일되었고, 천하와 이역(異域)의 통일은 천명이며, 따라서 명나라를 친다고 적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위키피디아
토요토미 히데요시 /위키피디아

 

도요토미의 이런 계획을 중국도 알고 있었다.

중국 정사인 <명사>(明史) 외국전에는 토요토미가 1586년에 “66()를 정복하고, 류큐(琉球, 오키나와)와 루송(呂宋, 필리핀 루손섬), 셴루오(暹羅, ·태국), 포랑지(佛郞機, 포루투갈과 스페인령) 등 여러 나라를 위협하여 공물을 바치게 했다. 그리고 연호를 분로쿠(文祿)로 고치고,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을 멸망시켜 점유하려 했다. 예전의 왕직(汪直. 중국인 해적두목)의 잔당을 불러 그의 기세가 더욱 교만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가 류큐에서 필리핀, 중국 남해안을 거쳐 멀리는 인도차이나에 이르는 해상의 조공을 받으려 한 점, 명의 수도 베이징(北京)이 아닌 저장성 닝보(寧波)에 쇼군의 주둔지로 계획한 점 등에 비추어 해상거점을 통한 동아시아 지배를 꿈꾼 것으로 풀이된다. 그가 쇼군 임지로 지정한 닝보는 그당시 동아시아 무역로의 중국 거점이었다.

 

그러면 도요토미의 이같은 과대망상적 세계관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원말명초(元末明初) 왜구는 중국의 해변과 강남(江南)에서 노략질했고,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타이완에 진출했다. 그들은 중국 해안과 동아시아 섬들을 거점으로 폭럭적인 방법으로 해상 교역을 추진했다. 그 무렵 포르투갈은 인도를 거점으로 서쪽에서, 스페인은 남미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해 동아시아에서 만났다. 서양 세력은 왜구와 접촉했다.

도요토미의 사고는 왜구적 경험에 이베리아 국가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양에 진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양거점을 기반으로, 육지를 포위하고 교역하는 전략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도요토미가 중국을 정벌하러 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었다. 16세기 중엽 왜구 침공로를 따라 저장·푸젠성 등 중국 남해안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 조선을 거쳐 베이징으로 침공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조선을 거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마도 대규모 육군과 전쟁 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지정학적인 문제를 고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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