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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야기
포르투갈 행해의 시대 초기 인물…바스코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에 초석
프레스터 존 찾아 나섰다 억류된 코빌량
2022. 04. 26 by 박차영 기자

 

리스본 티구스강 연안에 세워진 발견기념비엔 15~16세기에 포르투갈 항해자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새겨져 있다. 그 중 뒷줄에 페루 다 코빌량(Pêro da Covilhã)이란 인물이 있다.

코빌량(1460~1526)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에 앞서 10년전에 인도를 다녀온 탐험가다. 하지만 그는 끝내 포르투갈에 귀국하지 못하고, 유럽인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의 나라에 30여년간 억류되었다가 그곳에서 숨졌다. 그는 훗날 역사의 유명인물로 알려지지는 않했지만 포르투갈이 항해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는 것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리스본 발견기념비 속의 페루다 코빌량 /위키피디아
리스본 발견기념비 속의 페루다 코빌량 /위키피디아

 

중세 유럽에 동방 어딘가에 풍요한 기독교 왕국이 있고, 사제왕 요한(Prester John)이 그곳을 다스린다는 전설이 돌아다녔다. 소문은 부풀려져 프레스터 존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동방 박사의 후손이며, 그곳엔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차 있으며, 에덴동산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에 함락된 이후 유럽은 무슬림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무슬림 세력이 진출해 있는 이베리아반도의 공국들은 동방의 기독교 왕국과 손잡고 무슬림세력을 협공하겠다는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그런 계획을 구체화한 군주가 포르투갈의 주앙 2(João II)였다. 그는 프레스터 존을 찾기 위해 두 팀의 탐험대를 조직했다. 한 팀의 수장이 그 유명한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이고, 다른 팀 수장이 코빌량이었다. 주앙 2세는 디아스에게는 해로를 이용해 프레스터 존을 찾고, 코빌량에겐 육로를 통해 동방의 기독교왕국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디아스는 14878월 선단 3척으로 떠났다. 그는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 남쪽 케이프포인트를 폭풍의 곶이라고 명명하는데까지 성공했으나, 선원들의 반발에 되돌아갔다. 주앙 2세는 선원들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 그곳을 희망봉(Cape of Good Hope)로 개명했다.

 

페루 다 코빌량의 행적 /tropicalia
페루 다 코빌량의 행적 /tropicalia

 

코빌량은 어디로 갔을까. 코빌량은 148757일 알퐁소 파이바(Afonso de Paiva)와 함께 포르투갈을 떠났다. 그의 팀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제안을 무모하다고 판단한 유대인 지리학자들이 포함되었다. 코빌량은 이들에게서 지리와 수리학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습득했다.

코빌량의 팀은 바르셀로냐를 거쳐 나폴리로 갔고, 그곳에서 메디치가로부터 교환어음을 거래해 현금을 확보했다.

코빌량의 팀은 그리스 로데스 섬에서 무슬림으로부터 꿀을 거래했으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들은 나일강을 거슬러 카이로에 도착한 이후 육로로 홍해로 빠져나갔다. 홍해에서 카빌량과 파이바는 헤어졌다. 파이바는 동쪽 내륙방향으로 가기로 했고, 카빌량은 서쪽으로 향했다.

그후 카빌량은 페르시아만의 오르무즈(Ormuz)에 들렀다가 인도 서부 캘리컷과 고아를 방문했다. 이때가 1488년으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온 바스코 다 가마(1498)보다 10년 빨랐다. 그는 인도로 가는 항로와 풍향, 현지의 항고조건과 정치상황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는 다시 페르시아만 오르무즈로 돌아갔다. 당시 오만 일대의 오르무즈는 동아프리카 모잠비크 일대를 식민지로 개척하고 있었는데, 카빌량은 오르무즈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아프리카 동부 소필라(Sofala)와 마다가스카르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다시 홍해로 가서 1491년 카이로로 돌아갔다. 카이로에서 그는 파이바가 에티오피아로 가던 중에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포르투갈로 귀국하려 하는데, 본국에서 온 사신에게서 프레스터 존의 나라로 가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았다. 카빌량은 에티오피아로 가기 전에 인도양 항해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정리해 본국으로 보냈다. 그의 보고서에는 인도와 무역을 통해 계피아 정향 등 다양한 향료를 거래할수 있으며, 모잠비크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도 설명했다. 그의 보고서는 후일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를 개척하는데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리스본 발견기념비 속의 페루다 코빌량 /위키피디아
리스본 발견기념비 속의 페루다 코빌량 /위키피디아

 

코빌량은 왕명을 받고 프레스터 존의 나라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에티오피아에 도착해 코빌량은 국왕이 프레스터 존에게 드리는 서신을 전달했다. 에티오피아의 에스켄데르(Eskender) 황제는 포르투갈 국왕의 서신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토지와 귀족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황제는 구세주로 믿었던 프레스터 존이 아니었다. 황제는 그에게 귀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에스켄데르가 죽고 후임 황제들도 코빌량의 귀국을 허용치 않았다. 그는 향수병에 시달렸다.

에티오피아는 이스라엘에서 바로 전파된 기독교의 나라였지만, 현지 기독교는 포르투갈의 국교인 카톨릭과는 다른 종파였다. 코빌량의 입국 이후 에티오피아는 포르투갈에게 문호를 열었다. 에티오피아는 카톨릭 선교사의 입국을 허용했다. 1507년 선교사 주앙 구메스(João Gomes)가 들어온 이래 카톨릭 사제들이 연이어 입국했다. 1520년엔 포르투갈 왕실은 정식 대사 마테우스와 선교사 프란시스코 알바레스를 에티오피아로 파견했다. 코빌량은 이들과 만나 엉엉 울었다고 한다.

코빌량은 에티오피아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끝내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의 여행정보를 자유롭게 본국에 전달했다. 그가 보낸 지식은 그의 후배 항해자들에게 좋은 정보가 되었다.

코빌량은 비록 에티오피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로 인해 포르투갈과 에티오피아의 외교관계가 일찍부터 정착되었다. 1528~1543년에 소말리아 일대에 아달 술탄국(Adal Sultanate)이 침공했을 때 에티오피아 황제는 포르투갈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포르투갈은 인도에 주둔하던 해군을 파견해 에티오피아가 적군을 격퇴하도록 도왔다. 프레스터 존의 도음을 받으려다 오히려 도와준 셈이다. 이후 프레스터 존의 전설은 사라졌다.

키빌량은 1526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0대 초반에 와서 30년 이상 에티오피아에 억류되어 이국 땅에서 마지막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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