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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무적함대 패배후 스페인산 은 공급 위축, 전비 확대…내란과 외환 대비 못해
임진왜란 그후②…명(明), 은 부족에 경제위기
2019. 06. 14 by 김현민 기자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중국 명()나라는 극심한 은() 부족에 시달렸다. 명나라에선 은이 통화였기 때문에 통화공급 부족에 따른 디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 재정이 악화하고, 경기가 극도로 침체했다. 경제 위기에 빠진 명나라는 농민 반란과 변방 소수민족의 봉기를 진압할 군사비 확충에 실패하고, 결국 만주족의 청()에 의해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명나라의 재정 위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된다. 선조 32(1599) 1124일 사은사 신식(申湜)이 임금에게 귀국 보고를 하면서 중국 사정을 아뢰었다.

“(명나라) 대창(大倉)에 저장된 양식과 은자(銀子)가 떨어져서 각진(各鎭)이 여름부터 월량(月糧)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우리 나라 사신에게 상으로 주는 것도 임진년 이후로는 은자로 절급(折給)해서 노자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는데 이번 사행(使行)부터는 본색(本色)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칙서를 내리면서 흠사(欽賜)한 은자 역시 태복시(太僕寺)에 저축한 것으로 주기를 제청(題請)했다 하니 얼마나 절핍(絶乏)되었는지 상상할 만합니다.”

 

16세기 말에 명에 발생한 은 부족 현상은 수요와 공급의 괴리에서 발생했다. 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반면에 공급이 격감했다.

우선 은의 공급이 막혔다. 중국에 유통되는 은은 스페인산과 일본산, 국내산 등 세가지였다.

가장 공급량이 많았던 스페인산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배하면서 스페인 상인들이 쇠퇴로 타격을 받았다. 한번 전투에 졌다고 스페인의 아메리카 은 생산이 준 것은 아니지만, 영국 함선과 사략선들이 태평양의 마닐라~아카풀코(멕시코) 항로에 출몰하면서 보물 약탈에 나섰기 때문에 스페인의 선대 운영에 애로가 발생했다. 두 번째 은 공급국이었던 일본은 명-조선 연합군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공급을 중단했다. 중국내 은 생산도 신통치 않았다. 중국산 은은 규모가 적었는데다 신규 은광 개발도 미진했다.

 

그런데 은을 쓸데는 엄청나게 많아졌다.

임진왜란을 치른 명의 황제는 만력제(萬曆帝)는 조선 이외에도 두 군데서 더 전쟁을 치렀다. 그 하나는 15923월에 오르도스의 몽골 부족이 영하(寧夏)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597년에 남쪽 귀주(貴州)성에서 소수민족 묘족(苗族)이 난을 일으켜 4년 동안 운남(雲南)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명 조정이 1년간 예산이 400만 냥이었는데, 임진왜란에서만 7년간 1,000만 냥 이상 썼다. 동시다발적인 세 전쟁을 치르면서 명 조정은 엄청난 은을 쏟아 부었다. 그런 사정에서 황제는 조선의 사신이 갔는데, 선물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명 신종 만력제 초상화 /위키피디아
명 신종 만력제 초상화 /위키피디아

 

명의 은화 부족은 임진왜란 전에 발생했고, 왜란 기간에 폭발했다. 은화 가치는 급상승한 반면에 은화 부족으로 물건 가격이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현상이 가중되었다.

이럴 때 장사치들은 재빠르게 움직인다. 이들은 나라가 부도 나든 말든 자신의 이문만 챙기면 그만이다.

중국에서 은값이 폭등하자 상인들은 은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갔다. 전쟁이 터진 조선 땅은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진입하자 중국 상인들도 함께 따라 갔다. 리스크가 높아지면 수익률도 높은 게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진리다. 돈을 벌려는 자는 전쟁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숨 값이 곧 이윤이다. 요동의 상인들이 조선에 대거 이동해 왔다. .

그들은 1차적으로 명나라 군대의 봉급을 노렸다. 봉급은 은으로 줬다. 역사학자 한병기에 따르면 명군 병사 1인당 월급이 150전이었으니, 최고 10만명이 투입되었을 때 한달에 15만냥이 뿌려졌다. 이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군이 가는 길에 상인들이 수레를 끌고 따라가 장사를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명군이 1598년 사천에서 임실로 이동하는데 병사들보다 먼저 상인들이 도착해 소와 돼지를 잡아 구워 놓고 병사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상술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조선사람들을 상대로도 장사를 했다. 조선인들에게 푸른 물감을 들인 광목, 털모자, 털외투 같은 진기한 물건을 가져다가 팔았다. 한양에는 명나라 상인들이 거래하는 난전이라 불리는 상가가 들어섰고, 그곳에는 명나라 물건이 넘쳐나 사치풍조가 만연했다고 한다.

 

상인들이야 가격차(arbitrage)를 노리고 들어오지만, 명나라 정부는 조선에 은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 주었으니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은으로 갚으라는 얘기였다.

중국에 은이 부족해지고 은 가격이 치솟는 상황에서 명의 사절단은 조선에 오면 은만 요구했다. 함경도 단천에 대규모 은광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발은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 때 절정을 이뤘다.

광해군이 등극한 해인 1609년 책봉례를 주관하기 위해 온 명 사신 유용(劉用), 이듬해 왕세차 책봉의식을 주관하기 위해 온 염등(冉登)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용은 자신의 접대를 위해 책정한 비용을 전부 은으로 환산해 받아가며 약 6만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한다. 명나라 군대 4만명의 한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액수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그 다음에 온 염등도 상당한 액수를 챙겼다고 한다. 염등은 접대 차원에서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자고 해도 은을 가져오라 했고, 300냥 어치 예물을 조선왕(광해군)에 바치고 은 9천냥을 요구해 받아갔다고 한다. (한명기 저)

광해군 말년인 1621년 명나라 사신 유홍훈(劉鴻訓)과 양도인(楊道寅)8만냥의 은을 거두어 갔고, 후금 공격의 원병을 구하러온 양지원(梁之垣)도 수만냥을 수탈해 갔다고 한다. 유홍훈은 조선에서 수탈한 은으로 고향인 산동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명나라에서도 부러음을 샀다고 한다.

이같은 명나라 사신의 수탈이 광해군으로 하여금 명나라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은 만주에서 후금이 힘을 얻어나가는 가운데 명을 적극 지원하지 않고 후금()과 사이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은이 부족해지자, 명의 신종(神宗, 만력제)은 태감이라 불리웠던 세리들을 전국에 피견해 광세(礦稅), 상세(商稅)라는 명목으로 은을 마구잡이로 수탈했다. 세리들은 미세한 양의 은을 걷기 위해 민간의 가옥을 철거하고 무덤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중국 역사에서 이를 광세지폐’(礦稅之弊)라고 한다.

 

명나라 국고에 은이 고갈되어 갔지만, 상인들은 은을 숨겨놓고 내놓지 않았다.

당시 은 축장(蓄藏)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 바보 부자가 은을 뒤뜰에 숨겨 놓고, “여기에 은이 없음이라는 팻말을 꽂아 놓았다. 그 팻말을 본 또다른 바보가 궁금해서 파보니 금이 있었다. 그는 금을 훔쳐간 후 옆집에 사는 XX가 훔치지 않았슴이라는 팻말을 꽂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은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투기성 축장의 악순환이 나타났다. 은을 시장에 내놓지 않으면 은값이 더 올라가고, 더 많은 사람이 은을 쌓아두었다.

결제수단이자 교환수단인 은이 부족해지자, 물자 유통이 느려졌다. 돈이 없어 상업 활동에 지장이 생겼다. 상업중심지인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는 미곡상들이 장사를 포기했고, 직물업소 폐업이 잇따랐다. 실업자들이 징세관을 살해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가 빚어졌다.

 

 

명나라는 북로

명말 농민반란지역 /바이케백과
명말 농민반란지역 /바이케백과

 

(北虜, 몽골)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은으로 납세를 통일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면서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하지만 자국산 은이 부족한 상태에서 외국산 은으로 통화를 운용한 것이 오류였음이 말기에 알게 되었다. 은이 역으로 명나라 경제를 악화시켜 위기로 치닫게 한 것이다.

경제 악화는 민란을 촉발하고, 외적의 방비를 허술하게 한다. 이런 가운데 기근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献忠)의 반란이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세력이 있었다. 바로 만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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