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한국사
하백의 딸로 부루와 주몽 낳아…부여, 고구려, 백제의 산모
우리민족 뿌리는 유화부인?…모계적 관점의 해석
2019. 06. 15 by 김현민 기자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고려 시대에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서 단군(檀君)은 옛조선을 연 임금이라고 서술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어 여기서 생략한다.

우리 민족은 이 신화를 근거로, 단군의 자손임을 내세운다. 그런데 <삼귝유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단군 관련 내용을 종합하면, 단군보다는 유화(柳花)라는 여성이 우리민족을 형성한 뿌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삼국유사> 기이편 고구려조에 의하면 유화(柳花)는 하백(河伯)의 딸이다. 고대 국가는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하백은 서하(西河)라는 강 유역의 지배자였다.

<삼국유사>엔 유화 부인이 부루와 고구려 시조 주몽을 낳았다고 설명한다. 일연도 헷갈렸던지, 속설로 그 내용을 소개했다.

“<단군기>(壇君記)에서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또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한 후 주몽을 낳았다고 했으니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인 것이다.“(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일연은 이 내용을 전하면서 실수를 했다. 부루와 주몽이 배다른(異母) 형제라는 설명했다.

하백의 딸 유화(柳花)가 낳은 아들 가운데 단군을 아버지로 한 아들이 부루이고, 해모수를 아버지로 한 아들이 주몽이라면, 부루와 주몽은 한 어머니에 아버지가 다른 형제(異父兄弟)인 것이다.

<삼국유사>의 스토리는 갈수록 이해하기 힘들다.

기이편 북부여조에 천제(天帝)가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를 성으로 삼았다고 했다.

한자는 夫婁 또는 扶婁라고 달리 표현되었지만, 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루의 아버지는 해모수이고, 주몽의 아버지도 해모수다. 부루와 주몽은 이모(異母), 이부(異父) 형제가 아닌, 같은 부모를 둔 형제가 된다. 그렇다면 단군과 해모수가 동일인물일까. <삼국유사> 부여조에서처럼 단군이 성을 해씨로, 이름을 모수로 바꾸었단 말인가.

<삼국유사> 왕력(王歷)편에는 노골적으로 주몽의 아버지가 단군이라고 기록한다.

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에서 단군의 아들로 둔갑해 버렸다.

 

북한 평양에 있는 동명왕릉 전각내 유화부인 그림 /KBS 캡쳐
북한 평양에 있는 동명왕릉 전각내 유화부인 그림 /KBS 캡쳐

 

유화부인이 주몽을 임신해 낳는 과정도 복잡하다.

유화가 해모수와 사통을 하고 돌아오자 부모들이 유화를 내쫓았다. 부여의 금와왕이 그녀를 방안에 가두었다. 그런데 햇빛이 비추면서 유화는 임신이 되고 알 하나를 낳았다.

유화가 해모수와의 사통해서 임신을 했는지, 남자를 상징하는 햇빛이라는 존재에 의해 임신했는지가 애매하다. 임신을 한 상태에서 다는 남자와 사통을 한 것인지도 모호하다.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삼국유사>의 스토리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사회를 가족제도가 정착된 성리학의 세계로 이해할 수는 없다. 여성이 한 남자에게만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것은 성리학의 윤리일 뿐이다.

수천년전 인류사회는 모계의 전통이 강했다. 아버지가 누구이든 어머니로 내려가는 모계에 의해 혈통이 구분되었다. 유화 부인처럼 단군과의 사이에서 부루를 낳고, 해모수와 사통을 하고, 햇빛에 의해 주몽을 임신하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후대의 사학자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입장에서 신화를 서술하다가 모순 덩어리의 소재를 뒤죽박죽 정리했다. 승려인 일연도 그런 관점을 피하지 못했다.

유학자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과 해모수와 같은 부계가 불분명한 스토리는 아예 인용하지도 않았다. 김부식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얘기였을 것이다.

신화는 그 스토리가 생성될 때의 시대상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단군 신화와 부루, 주몽의 신화가 생성될 때엔 모계 사회였다. 가부장 사회의 관점이 아니라 모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민족은 유화부인에 의해 이어졌다고 볼수 있다.

고대 국가는 강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강을 지배하는 강력한 부족집단에 유화라는 강력한 여성 지배자가 있었고, 유화가 낳은 아들 중 하나인 부루가 부여를 건설하고, 또다른 아들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설했다. 그 아버지가 단군이든, 해모수이든, 단군과 해모수가 동일인물이든 중요하지 않다. 우리민족 가계의 중심엔 유화부인이 있다.

주몽의 큰 아들 유리가 고구려의 2대 임금이 되고 또다른 부인 소생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다. 크게 보면 유화를 중심으로 부여, 고구려, 백제가 건국한 것이다.

 

유화 부인을 중심으로 보면, 단군신화는 왜소해 진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단군은 천제의 후손으로, 조선을 건국한 신화적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일연 스님도 고조선조 말미에 ()나라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건국 시조가 중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숨어버린 일화는 신화를 퇴색시켜 버린다. 기자는 주 무왕이 멸망시킨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의 숙부였다. 주왕은 음란하고 방탕하게 정치를 하다가 주 무왕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쫓겨나 나라를 잃고 죽은 임금이다. 기자는 인자(仁者)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주 무왕의 입장에서 전 왕조의 혈족을 그냥 놓아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왕은 기자를 조선 땅에 보냈고, 단군이 쫓겨난 것이다.

 

단군 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거쳐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이에 비해 우리 민족의 한 뿌리를 형성한 고구려와 백제는 국가를 형성하고, 고구려는 낙랑군을, 백제는 대방군을 쫓아내 마침내 중국세력을 이땅에서 몰아낸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은 단군의 자손이라보다는 유화 부인의 자손이라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태백산 입구 단군성전에 걸린 단군 국조단군상 /사진=김현민
태백산 입구 단군성전에 걸린 단군 국조단군상 /사진=김현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 단군의 아들 부루의 스토리가 나온다. 세종실록의 단군신화 내용에서 <삼국유사>와 가장 큰 차이점은 단군의 아들 부루가 중국에 가서 중요한 모임에 참석한다고 서술하는 점이다. 물론 신화적 요소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 내용은 평양부에서 전해오는 전설을 서술하는 형식이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북 옥저(南北沃沮), ·북 부여(東北扶餘), ()와 맥()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東扶餘) ()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단군의 태자 부루가 참석하는 도산 조회는 중국 하()나라의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린 것을 기념해 제후들을 불러들인 모임으로, 단군이 아들 부루를 머나먼 중국 땅에 보냈다고 기록한 것은 조선조의 사대주의적 표현이다. 나라 이름을 명나라의 지침을 받아 짓고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조선이었으니, 고대사의 신화도 중국 중심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은 고조선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중국의 인자(仁者)인 기자가 동쪽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소중화사상에 빠져 있던 나라였다. 그러니, 조선은 단군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고 신화적 요소를 싹둑 잘라낸 채 전한 것이다.

다만 <세종실록>은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고 신라와 옥저, , 맥도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고 서술함으로써 한반도에 세워졌던 고대국가들이 모두 단군의 아들이라고 정리했다. 성리학의 나라가 유화부인을 시조로 모시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