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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로 유명세 떨쳐…세계최초 베스트셀러, 나폴레옹도 애독
괴테의 경험을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022. 05. 28 by 박차영 기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두 가지 인습의 벽을 무너뜨리며 슬프고 절망적인 사랑을 노래했다. 그 하나는 결혼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250년 전이나 지금 사회적으로나, 종교적, 도덕적으로 금지하는 것들이다. 20대 피끓는 청춘이 이런 장애에 부딛쳤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독일이 자랑하는 문호 괴테는 피끓는 젊은 시절의 사랑과 슬픔과 괴로움, 주저함을 아름다운 문체로 풀어내렸다. 독자들이 그 문장 하나하나에 빠져드는 것은 같은 나이에 겪었던 마음의 병이 살아나며 공감을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년 초판본 /위키피디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년 초판본 /위키피디아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썼을 때가 24살이었다. 그는 작품에서 제3자적 위치에서 베르테르를 설명했지만, 소설의 모티브는 괴테 본인이었다.

괴테(1749~1832)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신성로마제국 시절 최고법원이 있던 베츨라에서 변호사 일을 했다. 베츨라 부근의 도시 발하임이 소설의 배경이 된다.

베츨라에서 괴테는 요한 케스트너(Johann Christian Kestner)라는 친구를 사귄다. 케스트너에게는 샤를로테 부프(Charlotte Buff)라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괴테는 첫눈에 반해 그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괴테는 이룰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 온다. 샤를로테는 결국 케스트너와 결혼한다.

그 무렵 괴테는 친구 빌헬름 예루셀렘(Karl Wilhelm Jerusalem)이 상관의 부인을 연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케스트너에게 들었다.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사용한 권총은 케스트너가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괴테의 경험과 주변 인물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그대로 녹아 있다. 소설에 괴테는 베르테르로, 케스트너는 알베르트로 등장하고, 괴테가 사랑했던 여인 샤를로테의 이름은 그대로 살렸다.

 

베르테르 무덤 앞의 로테 /위키피디아
베르테르 무덤 앞의 로테 /위키피디아

 

소설은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낸 82편의 편지로 구성된다. 때론 로테에게 보낸 편지도 소개된다.

주인공 베르테르는 고향을 떠나 발하임이란 고장으로 이사를 하면서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는 어느날 파티에서 로테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베르테르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사랑의 열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로테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로테도 베르테르를 좋아하지만 약혼이라는 틀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로테가 알베르트와 결혼하기로 했음을 감지하고는 로테 곁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친구 빌헬름이 추천해 준 대로 공사의 비서로 일을 하게 되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8개월 만에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순례도 하고 전쟁터에도 나갈까 고민하는 등 로테를 잊지 못해 결국 다시 발하임으로 돌아간다.

로테의 곁에 돌아온 후 베르테르는 로테의 남편 알베르트에 대한 강한 질투을 느낀다. 로테는 베르테르에 동요하게 되고, 베르테르가 만난 뒤에는 알베르트와의 관계가 불편해 진다. 로테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질수 없음을 깨달은 베르테르는 죽음만이 사랑을 완성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로테를 향한 마지막 사랑이 거절당하자 베르테르는 결국 알베르트에게서 빌려 온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삶을 마감한다.

로테는 그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실신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베르테르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보리수나무 아래에 묻어주었다는 내용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탈리아 여행하는 중에 그린 괴테의 초상화(1787년). 독일 화가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이 그렸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여행하는 중에 그린 괴테의 초상화(1787년). 독일 화가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이 그렸다. /위키피디아

 

이 책은 1774년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괴테라는 젊은이가 문단에 신인이기도 했지만, 그는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책은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당시 유럽에선 왕족이든 귀족이든 너 나 할 거 없이 베르테르를 읽었고,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라는 평도 얻었다.

괴테는 이 책으로 큰 돈을 벌지 못했다. 당시 저작권이란 개념이 없었고, 곧이어 해적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괴테라는 신인작가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괴테는 일약 스타로 부상되었다. 그 유명세는 아직도 지속된다.

그의 소설을 보고 감탄한 바이마르 공국 귀족 칼 폰 아우구스트 공작이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했다. 괴테는 3년간 바이마르에서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돈은 두둑히 받았고, 공직을 이용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밤을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집트 원정 때에도 이 책을 끼고 갔으며, 일생에 이 책을 무려 16번을 읽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책을 토대로 자작 소설까지 써봤지만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1808년 독일을 침공하면서 괴테를 직접 대면하기도 했다.

당시 이 소설을 읽은 청년들이 베르테르 옷차림, 즉 푸른 연미복에 노란 조끼까지 똑같이 따라 입고 잇달아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종의 모방자살인데,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생겼다.

정작 작가 괴테는 82세까지 장수했다. 괴테는 20대에 실연의 아픔 때문에 죽고 싶다는 충동을 많이 느꼈으나, 이 소설을 쓰면서 마음을 많이 추스렸다고 한다. 그의 문학 풍조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후에 급격하게 반전한다. 그는 이 소설을 계기로 질풍과 노도로 상징되는 격동기를 뛰어 넘는다. 그는 후에 젊은 베르테르를 퇴폐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누군가 괴테에게 "선생님이 쓴 소설의 영향을 받아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라고 묻자, 그는 "난 그걸 쓰고 나서 슬픔에서 벗어났는데"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롯데그룹은 창업주인 고 신격호 회장이 젊은 시절 이 작품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기업 이름을 여자주인공 이름(Lotte)에서 따온데서 비롯되었다.

 

번역본(문학동네) /네이버 책
번역본(문학동네) /네이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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