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피플
동래 용당포에 기착, 조선인과 교류, 망원경과 권총 선물…실록에도 기록
1797년 조선을 첫 방문한 영국인 브라우턴
2022. 06. 01 by 김현민 기자

 

정조가 임금이 된지 21년째 되던 1797년의 어느날,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이 보고를 올렸다.

이국선(異國船) 한척이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표류해 도착했습니다. 배 안의 50인이 모두 머리를 땋아 늘였는데, 어떤 사람은 뒤로 드리우고 머리에 백전립(白氈笠)을 썼으며, 어떤 사람은 등()으로 전립을 묶어 매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전립(戰笠)과 같았습니다. 몸에는 석새[三升] 흑전의(黑氈衣)를 입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협수(挾袖)와 같았으며 속에는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랗습니다. 통역관을 시켜 나라이름(國號)과 표류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중국말, 만주어, 일본어, 몽고어가 모두 통하지 않았습니다.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8()이고, 너비는 7파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정조실록 2196)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만 있는줄 알았던 조선에 이국선이 나타난 것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인상착의와 표류선의 모양새를 정리해 임금께 보고했다.

오늘날 드라마작가들은 정조를 현명하고 인자한 왕으로 그리지만, 그는 성리학을 절대적 가치로 믿었던 수구적 군왕에 불과했다. 천주교도였던 윤지충이 어머니 상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임금은 천주쟁이를 집단살해하도록 허가를 내렸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종교탄압으로 기록된 신해박해(1791).

종교탄압을 피해 도주하던 천주교도 가운데 현계흠(玄啓欽)이란 중인이 있었다. 그가 동래에 들렀다가 용당포에 표박하고 있던 이국선을 보았다. 현계흠은 이국선을 조사하는 조선 관리들의 틈에 끼어 배에 올랐고, 서양인들에게 성호를 그어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렸다고 한다. 현계흠은 서양 배를 구경한 후 황사영 등 천주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배가 한 척만 있으면 조선의 전선 100척쯤은 쉽게 무찌를 수가 있다고 말했고, 그 죄로 관가에 투옥되어 사형을 받았다. (카톨릭평화신문)

 

부산 용당포에 도착한 영국함선 /자료=부산 남구청
부산 용당포에 도착한 영국함선 /자료=부산 남구청

 

은둔의 나라 조선을 경악시키고 두려움에 떨게 한 이 이국선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미스터리를 푸는데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다.

1797년 부산 용당포에 상륙한 선박은 당대 최대강국인 대영제국 해군 소속인 프린스 윌리엄 헨리(Prince William Henry)호였고, 선장은 영국 해군의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William Robert Broughton)으로 밝혀졌다. 브라우턴 함장은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을 포함해 북태평양 일대를 탐사했고, 항해기록을 정리해 1804년 런던에서 북태평양탐사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kfic Ocean, 17951798)를 출간했다. 그는 항해기에 1797824(양력 1014) 부산 용당포에 도착해 9일간 포구에 머물다 92일에 조선을 떠났다고 썼다.

 

부산 신선대와 신선대부두 /부산시청 홈페이지
부산 신선대와 신선대부두 /부산시청 홈페이지

 

브라우턴의 기록은 널리 읽혀 미국인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1882년에 펴낸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에도 인용되었다. 우리나라에 브라우턴 항해기가 소개된 것은 1980년대였다. 김원모 교수(단국대)가 브라우턴의 용당포 기착을 최초로 언급했고, 이후 김재승 교수(한국해양대)가 연구를 심화했다. 이후 학계에서 19세기를 전후한 유럽인들의 조선탐사 항해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었고, 우리나라의 사료에서 그 증거를 찾게 되었다.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영국 해군소속 브라우턴 일행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방문한 영국인이고, 그들이 방문한 용당포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신선대부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브라우턴이 방문한 이후 1816년 영국인 바실 홀이 서해안을 탐사했다.

용당포에 도착한 배에 대해 혼선이 있었다. 처음엔 그리피스가 프로비던스호(Providence)가 용당포에 기착했다고 서술한 것을 그대로 인용했으나, 김재승 박사가 영국 그리니치 해양박물관에서 브라우턴 항해기 복사본을 입수해 그 배가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였다고 정정하게 되었다. 프로비던스호가 대만 근처에서 최초한 후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가 프로비던스호의 이름을 물려받았는데, 여기서 착각이 생긴 것이다.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 /위키피디아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 /위키피디아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17621821)1793년 조지 3세 영국국왕의 명을 받고 프로비던스호의 함장이 되어 태평양과 북동 아시아 탐사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179410월 영국 본토를 출발해 지중해와 대서양을 거쳐 리우데 자네이루에 기항한 후 태평양으로 향했다. 그의 북태평양 탐사의 주된 임무는 사할린이 섬인지 육지의 일부인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가 쓰시마를 거쳐 179710월 현재의 부산 용당포에 기착하여 조선인들과 접촉한 사실을 자신의 항해기에 조선에 입항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조선을 Chosan 또는 Thosan이라고 표기했다. 그가 부산 용당포에 기착한 후 부산진 첨사가 승선해 탐문했고, 그 사실을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이 조정에 보고한 사실이 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브라우턴 함장이 탄 배의 이름은 프린스 윌리엄 헨리였고, 그후 프로비던스로 바뀌었다. 배는 승선 인원이 35명인 87톤급 스쿠너선으로 길이가 18(27.54), 너비가 7(10.71)밖에 되지 않은 소형 범선이었다. 천주교도 현계흠이 이런 배가 한 척만 있으면 조선의 배 100척쯤은 쉽게 무찌를 수가 있다고 한 말은 다소 과장되었지만 당시 조선에 이런 큰 배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브라우턴은 용당포에 도착한 풍경을 그의 항해일지에 기록해 두었다.

이른 아침 우리 배를 보기 위해 호기심에 가득한 남자, 여자, 어린아이들을 가득 실은 작은 배들이 우리 배를 둘러쌓다. 그들은 누볐거나 겹 천으로 된 흰 무명천으로 헐렁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크고 헐렁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속바지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남녀 모두가 흰 무명 버선과 볏짚으로 만든 짚신을 신고 있었다.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묶어 상투를 틀었고,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꼬고 땋아서 머리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배에서 가까운 남쪽에 있는 산(신선대)으로 올라가 방위각을 재기 위해 뭍으로 나갔다. 정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는 매우 넓었고, 항구의 모든 부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이 산의 강한 자력으로 인해 나침반의 바늘이 정확한 방향을 알리지 못하고 항상 북쪽이 아닌 동쪽을 알리므로 방위각 측정은 소용이 없었다. 나는 가파르고 높고 튀어나온 이 산이 우리 나침반 바늘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지도상에 이산의 이름을 자석의 머리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최초로 조선에 상륙한 영국인들은 조선어를 채집했다. 'One''Hannah'(하나), 'Hair''Murree'(머리)'Water''Mool'(), 'Man''Sanna'(사내), 'Woman''Kageep'(계집) 등으로 적었다.

브라우턴 일행은 조선의 해안을 측량하고 식료품 등을 구해 체류 9일만에 아무런 마찰 없이 조선 땅을 떠났다. 조선을 떠나던 92일 기록은 이렇다. “우리 친구 4명이 찾아와 우리가 출항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 나는 친구 1명에게 권총과 망원경을 선물로 주었다.” 영국인들은 9일 동안 호의를 보여준 조선인들에게 우리 친구라고 부른 것이다.

 

부산 신선대의 영국 앤드류 왕자 방문 기념비 /부산시청 홈페이지
부산 신선대의 영국 앤드류 왕자 방문 기념비 /부산시청 홈페이지

 

브라우턴의 용당포 방문은 한영교류사에 첫발로 기록되고 있다.

2001420, 영국 해군 중령 앤드류 왕자(요오크 공작)가 부산시 남구 신선대를 방문했다. 그는 200여년 브라우턴 함장이 부산 앞바다를 관측했을 신선대 정상에 기념비를 제막하고 기념수를 심었다.

외국 배를 보고 놀라던 그 곳은 200년후 우리나라 최대 무역항이 되었다. 신선대 컨테이너 부두는 오늘도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 수출화물을 싣느라 분주하다.

 


<참고자료>

김낙현·홍옥숙, 19세기를 전후한 유럽인들의 조선 탐사 항해와 항해기, 2018, 한국해양대

김낙현홍옥숙, 브로튼 함장의 북태평양 탐사항해(1795-1798)와 그 의의, 한국해양대

정조실록 21(1797) 96

카톨릭평화신문, 영국 해군 배에 오른 현계흠, ‘대박청래근거를 제공하다

부산시 홈페이지 한국과 영국의 역사적 첫 만남의 장소, 신선대

Wikipedia, William Robert Broughto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