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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정벌 2백년 만에 상황 역전…타타르 약화한 틈에 러시아 약진
몽골 지배 말기에 시베리아 운명 바뀌다
2022. 06. 22 by 김현민 기자

 

몽골제국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기에 시베리아는 몽골의 영토였다. 몽골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엔 칭기스칸의 후손들이 통치자로 부임했고, 지배력이 미치지 못한 곳에선 몽골의 지배에 복속했다. 4대 대칸 몽케 시기에 몽골의 영토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이르렀다.

1236년 칭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이르티시 강 서쪽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이 지역이 나중에 시베리아의 모체가 되는 시비르 칸국이 건설되는 곳이다.

바투의 휘하에는 몽골족이 10%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투르크족, 케라이트족, 위그르족, 호라즘인 등 서역의 다양한 부족들을 한집단으로 묶어 군사조직으로 편성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의 말발굽 소리에도 공포에 질려 타타르족이라고 했다. 침략자들은 피에 굶주린 야만인이었다. 키가 마차바퀴보다 작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는 모두 죽였다. 몽골족은 유럽인의 공포를 잘 활용했다. 항복하면 살려주고, 저항하면 모두 도륙했다.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수많은 동유럽의 공국들이 야만인에게 굴복했다.

 

몽골 4대 몽케 칸 시기의 영토 /위키피디아
몽골 4대 몽케 칸 시기의 영토 /위키피디아

 

슬라브족들은 무참하게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러시아 민족은 분열되었다. 수십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눠져 있었고, 공국 내에도 귀족들이 단합되어 있질 않았다.

1237년 타타르 군대는 볼가강을 건너 라잔공국을 공격했다. 라잔 공국에는 유리와 로만 두 형제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수도 라잔을 수비하던 유리는 라잔에서 수십마일 떨어진 소도시 콜롬나에 주둔해 있던 로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로만은 끝내 유리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라잔의 군대는 철저하게 몽골군에 저항했지만, 끝내 수도는 함락되었다. 몽골군은 라잔 주민 전원을 살해한 다음 콜롬나로 쳐들어가 로만과 그 부하들을 몰살시켰다.

동유럽에서 몽골군은 소수였다. 무기에서도 몽골군이 월등하지 않았다. 총포의 사용은 오히려 유럽이 앞섰다. 역사가들은 몽골기병의 신속한 기동력을 승리의 요인으로 꼽지만, 한두번 그 전설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마냥 유럽군대를 같은 전술로 속일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몽골군을 승자로 만든 요인은 규율과 내부 결속이었다. 그들은 지휘관 휘하에 똘똘 뭉쳐 있었다. 몽골의 부대가 폴란드와 헝가리의 먼거리에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 같이 움직였다. 이에 비해 유럽인, 특히 러시아인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소수의 침략자가 다수를 패퇴시키고 승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몽골족이 극동의 고려에서 동유럽 헝가리까지 대제국을 형성한 것은 단일대오의 형성, 즉 강력한 결속력이었다.

 

모스크바 공국의 팽창(1300~1547) /위키피디아
모스크바 공국의 팽창(1300~1547) /위키피디아

 

바투가 지휘하는 몽골족은 킵차크 칸국으로 분리되어 볼가강 하류 사라이(Sarai)를 수도로 삼았다. 킵차크 칸국은 금장칸국(Golden Horde)라고도 했다. 금장칸국은 바투의 후손들이 통치하며 200년 통일을 유지했다.

몽골 지배 하에 슬라브족의 공국들은 대부분 소멸되다시피 했다. 가장 북쪽의 모스크바 공국과 노보고로드공국이 있었는데, 몽골에 충성을 서약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세월은 강인한 몽골족을 나약하고 부패하게 했다. 초원을 달리던 기마민족이 정주하면서 편안함을 찾게 되고 부와 권력을 탐하면서 그들이 자랑하던 용맹함과 단결력을 일어버렸다.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며 내전이 벌어졌다.

15세기 중엽에 금장칸국은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노가이 칸국, 시비르 칸국으로 분열되었다. 분리된 개별 칸국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카잔 칸국에도 귀족들의 쿠데타가 반빌했고 시비르 칸국도 바투의 자손과 바투 동생의 후손 사이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반복되었다.

이에 비해 슬라브족은 통일되어 갔다. 몽골족에 납작 엎드려 있던 모스크바 공국이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펴더니 어느 순간에 거침없이 슬라브족 공국들을 병합해 나갔다. 노보고로드 공국은 모스크바에 합병되었고, 슬라브족의 마지막 독립 공국이었던 트베리도 모스크바 공국에 넘어갔다. 200년의 간극을 두고 몽골족과 슬라브족의 형세가 뒤바뀐 것이다. 일치단결했던 종족은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각개격파되었던 종족은 하나의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 상황의 역전은 피를 부르는 전쟁을 유발했다.

 

16세 몽골계 칸국 /위키피디아
16세 몽골계 칸국 /위키피디아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4(Ivan the Terrible)는 공포의 군주였다. 그는 귀족들을 억압하고 독재자가 되었다. 몽골 지배자가 그랬듯 독재자는 영토확장 전쟁에 나섰다.

이반 4세는 1547년 이반 4세는 대공의 딱지를 떼고 스스로 차르로 승진했다. 차르( Tsar)는 로마 시대 제위를 의미하는 카이사르(Caesar)의 러시아어 표현으로,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 이후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계승했다는 의미였다. 이는 모스크바가 서유럽의 신성로마제국과 대등한 황제국임을 과시하고, 동시에 몽골 대칸과 같은 지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차르와 대칸과의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1550년 무렵에 이반 4세는 최초로 상비군을 조직하고 군대 개혁을 추진했다. 차르는 포병과 공병을 포함한 소총 부대를 창설하고, 타타르 칸국들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했다. 이반의 목표는 칭기스칸의 계승자들이 통치하고 있던 카잔칸국, 아스트라칸국, 크림칸국이었다.

 

이반 4세가 카잔칸국을 정벌해 칸의 항복을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반 4세가 카잔칸국을 정벌해 칸의 항복을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1551년 이반 4세는 카잔칸국을 공격했다. 명분은 이슬람을 믿는 이교도를 정벌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은 스비야즈스크 지역을 점령해 목조 요새를 건설하고, 곧이어 카잔칸국 중심부를 공격했다. 이반 4세는 1552년 카잔칸국의 왕궁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1556년 카스피 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아스트라칸국까지 병합했다. 그 결과 당시 러시아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던 몽골의 계승국 중에서 크림 반도에 위치한 크림한국을 제외한 두 칸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타타르의 칸국 중에 가장 동쪽에 있는 나라는 시비르 칸국이었다. 이반 4세는 카잔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공략하는데 집중하는 바람에 시비르 칸국에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었다. 그곳은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맡겼다. 귀족들이 독자적으로 무장력을 갖고 시절이었다. 차르는 동부의 권문세가에 시베리아의 이권을 준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Golden Horde

Wikipeida Grand Duchy of Moscow

Wikipeida, Ivan the Terrible

제국의 탄생, 피터 터친, 웅진지식하우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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