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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마크 사후 14년간 요새 건설 통해 압박…시베리아 가로막는 장애 제거
시비르 전쟁, 유라시아 패권 가르다
2022. 06. 25 by 김현민 기자

 

다수의 세계사 연구자들은 동양과 서양의 패권이 전환된 기점을 청나라와 영국이 맞붙은 1차 아편전쟁(1839~1842)으로 잡는다. 이런 견해는 동양의 중심을 중국으로 보고, 서양의 중심을 영국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결과다.

아편전쟁에 앞서 1509년 인도 디우(Diu) 해상에서 벌어진 포르투갈과 구자라트 연합군의 전투도 동서양의 패권을 갈랐고, 그 뒤 1500년대 말 러시아차르국과 시비르칸국의 전쟁도 동서패권의 갈림길을 형성했다. 러시아와 시비르의 전쟁은 세계사에서 최대 영토를 확보한 몽골제국과 러시아제국의 패권에 단층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전쟁이라고 할수 있다.

디우 해전과 아편전쟁은 동서 해상패권 전쟁이라면, 시비르 전쟁은 육상 패권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은 거대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패권이 유럽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러시아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예르마크에 패퇴해 도주하는 쿠춤칸의 군대 /위키피디아
예르마크에 패퇴해 도주하는 쿠춤칸의 군대 /위키피디아

 

공포의 군주로 불리던 차르 이반 4(Ivan the Terrible)는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가 보낸 메신저(이반 콜조)의 얘기를 듣고 창고에 모피가 가득한 시비르칸국에 군침을 흘렸다. 차르가 예르마크에게 시베리아 왕자라는 칭호를 주고 자신의 군대를 파병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시비르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야심이었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차르에게 농락당했다. 자신들이 무기며 병력을 지원한 예르마크 부대가 황제 직속이 되면서 시베리아의 이권은 스트로가노프 형제에게서 멀어졌다.

예르마크는 시비르 공격 3년째인 15848월초 쿠춤칸의 공격에 사망하고 그의 부대도 전멸하다시피 했다. 앞서 그해 3월 무려 51년이나 대공 또는 차르에 재위한 이반 4세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몽골족과 투르크족의 혼합민족인 타타르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시베리아의 요새 오스트로그(야쿠츠크) /위키피디아
시베리아의 요새 오스트로그(야쿠츠크) /위키피디아

 

16세기 시베리아는 유럽 열강 어느 나라도 넘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서유럽인들은 시베리아란 곳이 있는지도 몰랐고, 바다 건너 신대륙에서 금은과 향료를 약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러시아만이 시베리아에 모피라는 보물이 있는 것을 알았다. 영토가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이반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표도르 1(Feodor I, 재위 1584~1598)가 즉위했지만, 병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했다. 실권은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표도르 2)에 넘어갔다.

모스크바 황실은 서서히 시비르를 조여갔다.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땅이었다. 러시아로선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앞서 예르마크의 시비르 공격은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 첫째가 물류의 장애, 즉 보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차르의 지원이 없이 예르마크 부대 단독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차르가 정치에서 멀리 있어도 차르국의 권력은 작동했다. 다만 이반 4세와 같은 무서운 추진럭은 없었다. 예르마크가 드러낸 문제점을 보완하며 그들은 차근차근 시베리아로 가는 길을 닦았다.

모스크바 당국은 보급선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그들이 선택한 전술이 요새화였다. 예르마크처럼 기동력 있는 공격은 일시적 승리를 얻을수 있지만, 보급이 차단되는한 영구한 점령이 불가능했다. 요새를 징검다리처럼 이어 건설하고, 그렇게 해서 형성된 긴 선을 공격선 또는 방어선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전술은 또다른 칸국인 크림과 노가이를 공격할 때 사용되었다. 중국의 만리장성, 로마제국의 장벽과 같은 성격이다.

1586년 변경에서 가장 가까운 튜멘에 300명의 공병부대를 파견해 요새를 건설했고, 이듬해 서시베리아의 중심지 토볼스크 요새를 건설했다. 그 요새를 오스트로그(Ostrog)라고 했다. 요새는 통나무로 지어졌다. 주변엔 4~6m 길이의 목책이 세워졌다. 목책 끝은 연필처럼 뽀족하게 깎여 있다. 당시 만들어진 오스트로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없다. 목조구조물이 모두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모형만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제국의 요새 건설 작업 /위키피디아
러시아 제국의 요새 건설 작업 /위키피디아

 

시비르의 쿠춤칸은 햇수로 3년에 걸쳐 저항한 끝에 수도 카쉴릭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귀족들을 통합시키는데 실패했다. 유력한 귀족인 세이탸크(Seidiak)은 쿠춤칸을 수도에서 내쫓아 버렸고, 쿠춤은 이리티시강 남쪽으로 내려가 독자적인 칸국을 세웠다.

1588년 러시아는 타타르의 분열을 이용했다. 러시아군은 셰이댜크에게 협상을 하자며 토볼스크로 불렀다. 그는 순진하게 약속장소로 가서 약을 탄 술을 먹고 죽었다. 함께 간 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었다.

남은 타타르 세력은 쿠춤칸 뿐이었다. 1590년 쿠춤은 러시아에 공물(야삭)을 바치며 야합한 타타르 일부 부족에 보복을 감행했다. 그러자 러시아군이 쿠춤을 공격해 부인 둘과 아들 압둘 카이르를 포로로 잡아갔다.

러시아는 점점 더 조여왔다. 1594년에 타라 요새가 건설되고, 같은해 오브강 유역에 수르구트 요새가 공사를 마쳤다. 쿠춤과 부하들은 이리티시강 상류로 거점을 이동했다. 1597년 러시아군 사령관 안드레이 보예이코프가 쿠춤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차르의 신하가 되라는 얘기였다. 적의 포로가 된 아들 압둘 카이르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차르가 땅과 귀족 작위를 줄 것이라고도 했다.

15989월 안드레이는 오브강 근처 쿠춤의 거소를 포위하고 왕자 둘을 죽이고, 후궁 8, 아들 5, 8명을 사로잡았다. 쿠춤은 도주했다. 안드레이는 이슬람 성직자를 칸에게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쿠춤은 성직자에게 나는 이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항복해도 얻을게 없고 줄 것도 없다는 얘기다.

쿠츰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최후에 관해 여러 얘기가 전한다. 노가이족에게 몸을 맡겼지만 1600년에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고, 1605년 부하라(우즈베키스탄)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러시아 차르는 항복한 그의 아들들에게 귀족 칭호를 내려 주었다. 나라를 내준 대가로 살아남은 자손들이 귀족칭호를 받으면 무엇하랴.

 

1598년 시비르 칸국이 멸망했다. 예르마크가 죽은지 14년이 걸렸다. 시비르의 멸망으로 광대한 시베리아와 러시아 제국을 가로막는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코사크족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시베리아 탐험에 나섰다.

 


<참고자료>

Wikipedia, Ostrog (fortress)

Wikipedia, Great Zasechnaya cherta

Wikipedia, Conquest of the Khanate of Sibir

Wikipedia, Kuchum

Wikipedia, Ivan the Terr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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