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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정교회 교구, 시베리아 크렘린…1708년 시베리아 주도 선포
토볼스크, 시베리아 개척의 교두보
2022. 06. 28 by 김현민 기자

 

차르 제국의 시베리아 개척은 점을 찍고,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을 긋고, 그 선을 중심으로 면을 확보하는 단계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점은 요새였다. 요새는 처음에 통나무집과 목책으로 지었다가 차츰 안정이 되면서 석조구조물의 성곽으로 변형되었다.

예르마크가 전사한 이후 차르 정부가 가장 먼저 지은 요새가 튜멘(Tyumen)이다. 타타르가 지배하던 시절엔 투라(Tura)라고 부르던 곳으로, 시비르칸국의 수도 카쉴릭에 근접해 있었다. 이반 4세를 이어 차르가 된 표도르 1(Feodor I)15867월에 바실리 보리소프수킨과 이반 마샤스노이 두 장군에게 타타르의 도시 투라에 요새를 건설할 명했다.

 

토볼스크와 튜멘의 위치 /위키피디아
토볼스크와 튜멘의 위치 /위키피디아

 

튜멘에 이어 1587년에 건설된 요새가 토볼스크(Tobolsk). 토볼스크는 카쉴릭의 폐허 위에 지어진 요새 도시로, 타타르를 정복하고 그들의 지배자가 된 것을 상징했다.

토볼스크는 토볼강과 이리시티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오브(Ob)강 본류와 지류의 수운을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키기 좋은 곳이다. 초기 시베리아에는 길이 없었다. 강이 이동로이자 수송로였다.

러시아인들은 토볼스크에 그리스 정교의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타타르의 토템을 누를 것이라 믿었다. 러시아인들의 시베리아 진출은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겉으론 종교를 앞세웠다. 토볼스크에 시베리아 최초의 정교회 교구가 들어섰다.

 

토볼스크 크렘린(요새) /위키피디아
토볼스크 크렘린(요새) /위키피디아

 

1708년 표트르 대제는 토볼스크를 시베리아 주도로 선포했다. 우랄산맥 서쪽을 시베리아 주 (Siberia Governorate)로 편제해 토볼스크에서 관리한 것이다. 1711년에는 최초로 주지사를 파견했다. 주지사의 관할지역은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알래스카)까지였다.

토볼스크에는 타타르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책을 설치했다가 석조물로 대체되었다. 1683~1686년 모스크바에서 석공들이 파견되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성 소피아성당을 닯은 벨리키 우스튜그(Veliky Ustyug) 교회를 지었다. 75m 높이의 종탑이 있는 이 교회는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건물이다.

차르는 17세기 후반에 토볼스크성을 건설했다. 정교하게 지어진 이 성은 시베리아의 유일한 석조성이며, 토볼스크 크렘린(Tobolsk Kremlin)이라 부른다. 성 안에 성소피아 대성당과 상인들의 정원, 지역민속박물관으로 쓰이는 주교궁 등 건축명소가 있다.

시베리아가 확장되면서 시베리아주는 1796년 토볼스크 주와 서시베리아 총독령으로 분리되었다. 서시베리아주는 옴스크(Omsk)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토볼스크를 모피를 수집하고 원주민의 공격을 방어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시베리아는 유럽지역 러시아보다 더 추웠다. 겨울에 익숙한 러시아인들이 제발로 시베리아로 이주하길 꺼려했다. 처음에는 토볼스크 주민 상당수가 타타르인들과 네네츠인 등 원주민이었으나, 스웨덴과의 전쟁(1700~1721)을 치르면서 포로들을 강제로 토볼스크로 이주시켰다. 한 때 토볼스크에 스웨덴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했다. 그곳엔 시베리아 최초의 학교, 극장, 신문사가 설립되기도 했다.

 

토볼스크의 벨리키 우스튜크 교회 /위키피디아
토볼스크의 벨리키 우스튜크 교회 /위키피디아

 

1838년 토볼스크성 옆에 감옥을 성채로 지어 죄수를 수감했다. '죄와 벌'을 쓴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 이곳을 다녀갔으며,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이 감옥성에 일시로 수감되었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인 아발락스키즈나멘스키 수도원을 비롯한 여러 개의 수도원이 있다. 이들 수도원은 종교, 역사, 건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토볼스크 인근에는 기원전 10세기의 봉분과 이교도들의 사당 등 고대유적이 산재해 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영토가 급속히 팽창하고 토볼스크 인근의 모피 자원이 야생동물 남획과 멸종하면서 한 때 러시아 시베리아의 중심지였던 토볼스크는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초반에는 옴스크가 토볼스크의 기능을 이어받았고, 토볼스크는 정체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에는 시베리아 철도가 토볼스크를 비껴갔다. 시베리아 철도는 튜멘과 옴스크를 직접 연결하면서 소도시로 전락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에 혁명정부는 퇴위한 차르 니콜라이 2세 가족과 수행원들을 토볼스크에 유폐했다. 백군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차르를 구하려고 공결할 것이란 소문에 볼셰비키들은 황제와 일족을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기고 그후 집단 처형했다.

내전 기간인 1920년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반혁명의 타깃이 되고 있는 토볼스크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주도를 튜멘으로 옮기고, 토볼스크는 소읍으로 강등했다. 1996년에야 토볼스크는 독립시로 격상되었다. 현재 튜멘의 인구는 77만명, 토볼스크는 10만명에 근접한다.

한때 시베르칸국의 수도였다가 시베리아 개척의 중심지인 토볼스크는 작은 도시로 전락했다. 지금은 연간 2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관광도시가 되었다. 인근에 석유가 터지면서 석유정제와 석유화학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러시아 최대의 폴리프로필렌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참고자료>

Wikipedia, Tobolsk

Wikipedia, Tyumen

모피로드, 윤성학, K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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