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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과 만주족 거주지역에 코사크 출몰…식량 찾아 아무르 탐사
살인마 포야르코프의 아무르 탐험
2022. 07. 13 by 김현민 기자

 

아무르강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몽골고원에서 발원해 태평양 오호츠크해로 빠져나가는데, 하구 건너편에 사할린섬이 버티고 있다. 길이는 2,824km로 세계 10위이며, 유역 면적이 185.5에 달한다.

아무르(Amur)는 몽골어 무렌에서 파생한 말로 큰강(한강)이란 의미이며, 언어학자들은 우리말의 ’, 일본어 미즈와 같은 뿌리를 갖는다고 본다. 중국인들은 헤이룽장(黑龍江)이라고 부르는데, 고대엔 흑수(黑水)라 불렀다. 중국 역사에서 아무르강 유역이 흑수말갈(黑水靺鞨),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등장하는데, 금나라와 청나라의 모태가 되는 만주족의 땅이었다.

아무르강이 중국 땅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칙수노아간영령사비기(勅修奴兒干永寧寺碑記)와 선덕중건영령사기(宣德重建永寧寺記)라는 2개의 비석이다. ()나라 영락제(永樂帝)와 선덕제(宣德帝) 시기에 이시하(亦失哈)라는 환관이 원정대를 이끌고 아무르강 하류를 복속시키고, 영령사(永寧寺) 절을 짓고 세웠다. 비석에는 명 조정이 누르칸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만들어 흑룡강 하류와 사할린을 지배하에 두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 건립시기는 1413년과 1433년으로 확인된다.

 

아무르강 유역 /위키피디아
아무르강 유역 /위키피디아

 

수천년 동안 몽골족과 만주족이 살던 아무르강 일대에 러시아가 접근한 것은 17세기 중엽이었다. 1632년 극동시베리아 거점요새로 건설된 야쿠츠크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식량이었다. 야쿠츠크는 시베리아에서도 가장 추운 지역으로 곡물이 자라지 않았다. 도로나 철도가 뚫리지 않은 시절에 러시아 유럽에서 식량을 운반하는데도 몇 달이 걸렸고, 그 양도 제한되었다.

야쿠츠크 보예보다인 페테르 골로빈(Peter Golovin)은 원주민에게서 남쪽에 농사를 짓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골로빈은 이 막연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탐험대를 조직했다. 탐험대 대장에는 바실리 포야르코프(Vassili Poyarkov)가 임명되었다.

포야르코프의 생몰시기와 고향 등에 대해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다만 그는 코사크였다. 아무르 탐험에 나서기 전에 그는 야쿠츠크에서 기록물 관리와 통신업무를 했다.

 

포야르코프를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는 16436월에 야쿠츠크를 출발했다. 대원은 코사크 122, 샤냥꾼 15, 통역사 2, 길안내자와 대장장이 한명 등 133명으로 구성되었다. 포야르코프는 아무르에 대한 아무런 지리정보를 갖지 못했다.

그들은 레나(Lena)강 상류를 거슬러 알단(Aldan), 우추르(Uchur), 고남(Gonam) 강을 따라갔다. 64곳에서 육지를 건넜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겨울이 다가올 무렵 스타노보이 산맥에 도달했다. 이 산맥은 중국에선 외흥안령(外興安嶺) 산맥으로 불리는 곳이다.

포야르코프는 스타이노보이에 캠프를 설치해 겨울을 보내려 했다. 그곳 현지주민에게서 산을 넘어 실카강 계곡에서 귀리, 보리, 기장, 메밀, 콩이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곳은 다우르(Daur) 지역이었는데, 몽골족 일파인 다우르족이 살고 있었다.

포야르코프는 겨울캠프에 49명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산맥을 넘어 제야강(Zeya River)을 만났다. 제야강은 레나강과 다른 아무르 수계의 지류다. 그곳엔 농토가 있었고, 다우르족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2001년 러시아 주화에 새겨진 포야르코프 /위키피디아
2001년 러시아 주화에 새겨진 포야르코프 /위키피디아

 

코사크들은 아무르족에게서 돈을 주고 곡식을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르족이 애써 지은 농사를 선선히 내줄리 만무했다. 포야르코프는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농가에서 곡식을 약탈했고, 곡식을 내놓지 않는 주민을 죽여버렸다. 포야르코프와 코사크의 잔인함은 금새 소문이 났다. 몽골족들은 양놈들이 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곡식을 들고 달아나 버렸다. 포야르코프 일행은 한겨울에 식량을 구하지 못했다. 소나무 껍질을 깍아 먹거나 야생동물을 사냥했다. 그것으로 모자라면 현지주민을 포로로 잡아 허기를 메웠다. 러시아 살인귀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그들의 행군속도보다 빨리 퍼져나갔다.

포야르코프의 행동은 내부에도 반발을 일으켰다. 대원들은 대장의 포악함에 치를 떨었지만 감히 대들지 못했다. 그는 외부의 적보다 더 가혹하게 내부의 적을 처단했다. 다수의 대원들이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죽어나갔다. 1644년 봄이 오자 스타노보이 산맥 북쪽에 체류하던 대원들이 합류해 인원을 보충했다. 그들은 제야강을 따라 내려가 그해 가을에 아무르 하구애서 길랴크족(Gilyaks)을 만났다. 길랴크족은 니브흐족(Nivkhs)이라고도 하는데, 아무르 하구와 사할린섬에 거주하는 만주족 계열이다.

포야르코프는 겨울이 오기전에 왔던 길을 돌아갈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지나온 마을에는 현지 부족들이 복수의 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길랴크족에게선 먹을 것을 뜯어낼수 있었다. 그는 아무르 하류에서 두 번째 겨울을 보냈다.

 

포야르코프 일행은 갈수록 식량을 구하기 힘들어졌다. 한번은 27명의 대원을 보내 먹을 것을 찾도록 했지만 2명만 살아 돌아왔다. 그들은 타타르 해협을 따라 오호츠크해 해변을 따라갔다.

포야르코프 일행은 8년 전에 이반 모스크비틴(Ivan Moskvitin) 탐험대가 오호츠크해를 처음 발견할 때 지어놓은 막사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세 번째 겨울을 보냈다. 1646년 봄이 오자 그들은 모스크비틴 일행이 돌아간 길을 따라갔다. 산맥을 넘어 마야강(Maya River)을 만났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 레나강을 만나 야쿠츠크로 돌아갔다.

포야르코프의 탐험기간은 겨울을 세 번 보내며 3년을 꼬박 채웠고, 지나간 거리는 6,000km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100명 이상의 대원이 추위에 동사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원주민에게 죽음을 당했다. 갈 때 인원은 134명이었으나, 돌아올 땐 40명에 불과했다.

 

포야르코프는 아무르를 최초로 탐험한 코사크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상을 받지 못했다. 대원들은 그를 죽이고 싶어했다. 야쿠츠크로 돌아간 이후 대원들은 그를 고발했고, 야쿠츠크의 보예보다는 그를 모스크바로 압송했다. 그후 그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야수성은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르강 유역에 농지가 있고, 곡식이 자란다는 사실, 그곳에 중국이라는 대국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시베리아의 강들이 모두 북극해로 빠지는 것과 달리 그는 아무르강이 동쪽으로 흘러 태평양에 도달한다는 것도 입증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대우받지 못했지만, 그의 탐험 기록은 후배 탐험가들에게 새로운 의욕을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포야르코프를 이어 아무르 탐사에 나선 코사크는 예르페이 하바로프였다.

 

아무르강은 만주를 가로지르는 쑹화강(松花江)과 합류한다. 쑹화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다. 코사크의 아무르 출현은 만주의 질서를 흔들었다.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는 고향에 서양오랑캐가 출몰하는데 긴장하고 대치하게 된다. 또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복속한 조선도 러시아의 남하에 흽쓸리게 된다.

 


<참고자료>

Wikipedia, Vassili Poyarkov

Wikipedia, Amur

Wikipedia, Yishiha

모피로드, 윤성학, K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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