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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에게 차르에 복속하라는 칙서 보내…현지부족 요청에 청군 출동
중국군과 첫 충돌…하바로프의 아무르 원정
2022. 07. 14 by 김현민 기자

 

하바로프스크(Khabarovsk)는 러시아 극동부의 중심도시다. 인구 60만명으로 블라디보스톡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도시 중심부 역 광장에는 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동상의 인물은 바로 이 도시의 이름을 만들어준 예로페이 하바로프(Yerofey Khabarov, 1603~1671).

러시아인들은 하바로프를 아무르강의 개척자로 존경하며, 그의 이름을 아무르강변의 주와 도시, 역사에 붙이고 동상을 세웠다. 하지만 원주민인 몽골 또는 만주족에겐 살인마요 나찰(羅刹)로 불리며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하바로프의 아무르 원정으로 동양의 패권국인 청나라가 긴장했고, 러시아라는 존재도 모르고 있던 조선 조정은 아무르강에 군대를 파견해야 했다.

 

하바로프 동상이 서 있는 하바로프스키 역 광장 /위키피디아
하바로프 동상이 서 있는 하바로프스키 역 광장 /위키피디아

 

하바로프는 1603년 유럽 러시아의 북부에 있는 아르한겔스크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인으로 성장했다. 시베리아에서 많은 돈을 번 스트로가노프 가문에서 경영자로 일했으며, 22세이던 1625년에 토볼스크에서 타즈강의 북극해 입구인 만가제야(Mangazeya)까지 항해했다. 3년후 북극해로 흐르는 케타강을 탐사하고 또 2년후엔 만가제야에서 토볼스크까지 역주행에 성공했다. 30대인 1632~41년 사이엔 레나강을 두루 탐사하며 쿠타강과 키렝가강 합류지점에 제염소와 농업 정착지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는 사업가이면서 탐험가였다. 탐험과 사업이 결합할 때엔 약탈행위가 수반된다. 하바로프가 지나가는 곳에선 약탈과 살인, 강간, 노예화가 따랐다. 그에게 현지 주민은 야만인에 불과했다. 코사크 출신인 그는 러시아인에겐 피지배계급이었지만, 시베리아에선 지배자로 군림했다.

 

레나강에서 탐험과 사업을 겸하던 하바로프는 바실리 포야르코프의 아무르강 탐험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는 특유의 장사꾼 감각으로 아무르강이 돈이 된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곳에서 발견되는 값진 물건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1649년 그는 자기돈으로 70명의 탐사대를 구성했다. 1차 원정은 레나강에서 아무르강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게 목표였다. 도로가 뚫리지 않은 시절에 강이 길이었다. 강을 따라 가다 다른 강의 유역으로 건너갈 때는 배를 끌고 분수령을 넘거나, 그러지 못할 경우 배를 숨겨두고 새로 강을 찾아 그곳에서 배를 건조해 항해했다.

그는 포야르코프가 개척한 코스, 즉 레나강의 지류 알단강에서 아무르로 건너가는 방법이 너무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팀강을 이용하는 방법을 고려했다. 그런데 한 사냥꾼이 올료크마강(Olyokma River)을 이용하면 쉽게 아무르로 건너갈수 있다고 그르쳐 주었다.

1649년 봄 하바로프는 올료크마강, 퉁기르강을 거쳐 아무르의 지류인 실카강(Shilka River) 에 이르렀다. 그가 도착한 곳은 몽골족 일파인 다우르족 지역이었는데, 앞서 포야르코프가 저지른 만행으로 주민들은 마을에서 거의 철수한 상태였다.

그는 이듬해 5월 야쿠츠크로 돌아와 지역사령관인 보예보다에게 아무르강에 농지가 있고, 중국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으니, 보다 대규모의 정예병력을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야쿠츠크의 보예보다는 드미트리 프란츠베코프(Dmitry Frantsbekov)였다. 성미 급한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조정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 하에 하바로프로 하여금 다시 원정길에 나서라고 명령했다. 병력도 보충해주었다. 보예보다는 차르 알렉시스 명의의 칙서를 여러장 작성해 다우르족을 만나면 주라고 했다. 그 칙서는 알비진의 부족장 라프카이(Lavkai)그의 지배자 복도이(Bogdoi)에게 보내는 것인데, “러시아 차르에게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6천명의 강력한 군대를 보내 짓밟아 버리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야쿠츠크 보예보다는 복도이를 아무르강의 부족장 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청나라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였다.

 

예로페이 하바로프 동상 /위키피디아
예로페이 하바로프 동상 /위키피디아

 

1650년 가을에 하바로프가 산을 넘어 다우르에 도착했을 때 다우르족은 무장하고 저항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바로프는 차르의 칙서를 전달하고 곧바로 월동준비에 들어갔다. 칙서가 베이징에 도착하자 청나라가 분노했다. 한족에게서 동쪽 오랭캐(東夷)로 멸시받던 만주족이 러시아라는 새로운 북쪽 오랑캐(北狄)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바로프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아무르강 북쪽에 알바진(Albazin)이란 곳에 동계병영을 구축했다. 그는 다우르족과 충돌하면서 원주민의 무장이 별 것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무기는 고작해야 화살이었고, 코사크 부대는 총과 포로 무장했다. 다음해 봄이 돌아오자 본격적인 약탈이 시작되었다. 그는 야쿠츠크에서 병력을 추가로 보충했다.

하바로프가 이끄는 코사크 부대는 원주민 집을 불태워 모피를 빼앗고 여자들을 강간한 후 끌고가 노예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투자한 돈의 본전을 뽑기 위해 폭력으로 약탈행위를 자행했다. 그도 앞서의 포야르코프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뒤지지 않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16519월 하바로프 부대는 지금의 하바로프스크에 가까운 아찬스크(Achansk)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캠프 조성작업에 착수했다. 이번엔 다우르족이 공격했다. 108일 다우르족은 1,000명의 병력으로 하바로프 원정대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다우르족은 병력수에서 우세했지만, 러시아의 총포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우르족은 청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해를 넘겨 1652324일 청군은 닝안(寧安, 寧古塔)에서 다우르족, 두체르족으로 1,500, 여진족 600명등으로 2,000명의 대군을 편성하고 하이세(海色)에게 지휘를 맡겼다. 청나라 군대는 압도젹인 병력으로 러시아 요새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패배했다. 하이세는 무능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떠안고 사형에 처해졌다.

이번엔 중국군대 6,000명이 몰려왔다. 하바로프는 수백명으로 중국의 인해전술에 대적할수 없다고 판단해 어둠과 안개를 틈타 북쪽으로 도주했다. 그는 제야강 일대에 머물면서 부대원들과 원정을 계속할 것인지, 이곳에 머물 것인지를 논의했다. 하바로프는 원정을 계속해 약탈을 더 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성공에 도취했고, 독선적이었다. 그의 독선에 반발하는 부하도 많았다. 그해 8월 제야강에 머물자고 주장하는 부하 136명이 하바로프에게 반기를 들고 배 3척을 탈취해 도주했다.

충성파들과 함께 남아 있던 하바로프는 야쿠츠크 보예보다에게 그동안의 탐험 내용과 전투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솔직하게 원주민 마을을 방화하고 살인했으며, 고문을 가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차르는 원주민을 존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살인과 방화는 칙령을 어긴 것이 되었다.

 

1653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귀족 드미트리 지노비예프(Dimitry Zinoviev)가 병력을 이끌고 내려와 하바로프를 체포하고 모스크바로 압송했다. 그는 항의했지만, 그의 상관인 보예보다와 부하 누구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칙령을 어긴 혐의로 모스크바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 지노비예프는 만주족과 협상해 러시아 원정군의 철수를 약속했고, 하바로프 후임으로 오누프리 스테파노프(Onufriy Stepanov)를 임명했다.

하바로프는 재판에서 그동안의 공로가 인정되어 소귀족의 지위를 부여받고, 이르쿠츠크 부근의 작은 마을 일림스크에 영지를 받았다. 다만 그는 아무르강 출입이 금지되었다.

 


<참고자료>

Wikipeida, Yerofey Khabarov

Wikipeida, Khabarovsk

모피로드, 윤성학, K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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