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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와 중국의 교역 창구…중국에 모피 수출, 중국산 비단과 차 수입
중국 무역으로 번성한 국경도시 캬흐타
2022. 07. 21 by 김현민 기자

 

중국은 전통적으로 북방민족의 호전성을 달래기 위해 시장을 만들어 물물교환을 허용했다. 이를 호시(互市)라 했다. 북방의 흉노·선비·돌궐·위구르를 비롯해 서방의 탕구트·티베트와 중앙아시아국가들과도 호시무역이 이루어졌다. 호시는 오랑캐 호를 써서 호시(胡市)라고도 하고, 국경에서 이뤄진다고 해서 관시(關市)라고도 했다.

중국이 1727년 조약에서 러시아에게 두 개의 시장을 열었다. 그 하나는 캬흐타(Kyakhta)이고 다른 하나는 추루카이투(Tsurukaitu)였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호시였다. 시장을 열어줄 터이니, 북쪽 경계를 교란하지 말라고 러시아에 요구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교역을 원했다. 농사가 되지 않는 시베리아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야 하고, 서유럽의 생산물보다 뛰어난 동양의 물산을 얻기 위해서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초까지만 해도 중국의 상품은 유럽의 상품보다 뛰어났다. 중국 상품을 가져가 유럽에 팔면 매매차익이 컸다. 러시아는 중국이란 당대 최강국과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장사를 통한 이익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캬흐타 위치 /위키피디아
캬흐타 위치 /위키피디아

 

캬흐타는 몽골족의 일파인 부랴트족이 유목생활을 하던 초원이었고,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협상을 벌이기 전까지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 1727년 국경협상이 벌어지는 도중에 세르비아의 상인 사바 블리디스라비치(Sava Vladislavich)가 차르의 명을 받고 국경이 그어질 곳에 상업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셀렝게강이 바이칼호로 흐르는 러시아측 국경에 캬흐타를 세웠다. 두 나라는 캬흐타와 추루카이투 2곳을 통과해 무역을 하기로 합의했고, 조약 명칭을 캬흐타 조약;이라고 명명했다.

추루카이투는 캬흐타 동쪽 네르친스크 근처에 위치하는데, 이르쿠츠크에서 베이징으로 갈 때 캬흐타를 거치는 것보다 7주나 더 걸렸다. 상인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이 도시를 갈리 없었고, 결국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에 비해 캬흐타는 시베리아 중심도시 이르쿠츠크와 셀렝게강, 바이칼호, 예니세이강으로 연결되고 외몽골의 우르가(울란바타르)와도 수운으로 연결되는 교통요지였다.

조약이 체결된 후 중국측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캬흐타의 건너편에 마이마이쳉(賣買城)을 조성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200~300m에 불과했다. 8m의 대로가 두 도시를 연결했다. 국경에는 양국이 초소를 세워 경비병을 두었다.

 

1885년 캬흐타 /위키피디아
1885년 캬흐타 /위키피디아

 

처음에는 캬흐타와 마이마이쳉 사이에 교역이 이뤄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국영 캐러반이 캬흐타를 출발해 베이징에 가서 물건을 사고 판 다음에 캬흐타로 돌아왔다.

캬흐타 조약 직후 캐라반을 이끌고 베이징을 다녀온 첫 외교사절은 로렌츠 랑게(Lorenz Lange)였다. 이 캐라반이 거래한 내역과 일정이 전해진다.

로렌츠는 사절단과 상인 205명을 대동하고 17279월에 캬흐타를 출발해 12월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 가져간 것이 1.650필의 말, 마차 475대분의 상품, 예비용 마치 162, 식량대용 소 665마리였다. 그들은 285.404 루블을 소지했고, 210만장의 모피를 실었다. 로렌츠의 상단은 중국 허베이성 장자커우(張家口)까지 가는 도중에 말 489, 258마리를 잃었다. 그들은 남은 소와 말을 장자커우에 두고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는 이번원(理藩院)의 관리들이 나와 까탈스럽게 굴었다. 러시아 대상들은 중국 관리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거래는 더디게 이뤄졌고, 그들은 베이징에서 6개월간 머물렀다. 숙소는 러시아관에서 해결했다. 그들은 돌아올 때 125천 야드의 비단, 57만 야드의 면직물, 3만 파운드, 65천 루블 어치의 금과 은을 샀고, 필리지 않은 모피 40만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17287월에 베이징을 출발해 9월에 캬흐타에 도착했다.

 

몽골고원을 지나는 대상 /위키피디아
몽골고원을 지나는 대상 /위키피디아

 

청나라 관리들은 러시아 상인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청조는 외몽골의 칸에게 러시아 상인이 국경에 도착하면 즉시 보고하고 관원을 캬흐타에 보내 상인을 영접하고 베이징까지 호송하도록 했다. 상인들이 러시아관에 머물 때 병부에서 병력을 파견해 지켰고, 상인들이 외출할 때에도 청병이 수행했다. 그리고 교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국경선까지 호송해 주었다.

그나마 대상 무역은 1737년까지만 허용되었다. 그후 캬흐타에서만 교역을 허용하고, 베이징에서의 교역은 금지했다.

 

대상무역에서 국경무역으로 전환하면서 캬흐타와 마이마이쳉의 쌍둥이 국경도시는 빠르게 발전했다. 두 나라 상인들은 국경도시를 오가며 거래를 했다. 중국 상인들은 마이마이쳉에 큰 가게를 열어 마당에 상품을 진열해 놓았고, 러시아 상인들이 와서 사갔다.

러시아측의 수출품을 보면, 가격기준으로 70~85%가 모피였고, 나머지는 유럽에서 생산된 상품이었다. 모피 수출규모는 점차 줄어들었고, 상품이 그 공백을 메우는 추세를 보였다. 모피는 연간 2백만~4백만장이 팔렸다. 1800년대 이후 캬흐타에서 판 러시아측 상품의 3분의2가 비()러시아산이었다.

러시아의 수입품은 50~60%가 면직물이었고, 그 다음으로 비단류가 3분의1을 차지했다. 중국 차의 수입이 1792년에 전체 수입의 22%였는데 19년후엔 40%로 급증했다. 중국산 담배도 사갔다.

이 두 도시엔 종래 비단길 길목을 지키던 부하라 상이들도 드나드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영국의 공학자 새뮤얼 벤덤(Samuel Bentham)1782년 국경도시를 방문했다가 중국 관리에게서 환대를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스 정교의 호사스런 교회와 러시아식 통나무집의 도시를 구경하고 몇걸음 옮기면 또다른 관문을 지나 중국도시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붉은 옷을 입은 라마교 승려와 절을 볼수 있다. 동양과 서양이 남북을 흐르는 강을 따라 이어져 있는 진풍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1910년 외몽골 마이마이쳉의 사원 /위키피디아
1910년 외몽골 마이마이쳉의 사원 /위키피디아

 

캬흐타의 무역은 팽창했다. 캬흐타를 통한 러시아의 수출액은 175560만 루블, 1768100만 루블, 1780270만 루블, 1800420만 루블, 1805570만 루블로 팽창했다. 그 시대에 금본위제였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50년 사이에 러시아의 캬흐타 무역액은 10배 가량 늘어난 것이다.

캬흐타는 중국으로 가는 러시아의 관문이 되었다. 이 곳에서 중앙아시아 탐사대와 지리학자들이 출발했다. 한때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사마르칸트가 캬흐타로 옮겨갔다. 캬흐타에서 러시아 부자들은 집에 당구장과 온실을 설치했고, 여인들은 유럽 최신 유행의 의상을 입었다. 서재에는 프랑스 소설이 꽂혔고 마굿간엔 영국산 말이 사육되었다. 캬흐타의 자녀들은 파리로 유학하고 교회 건축에는 이탈리아산 건축기사가 동원되었다. 캬흐타의 교회에는 수정이 박혔고, 문은 은으로 장식되었다.

 

하지만 캬흐타는 경제적 팽창을 따라가지 못했다. 도시계획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구가 밀려들었기 때문에 도시는 지저분했고 번잡했다. 19세기에 차 거래소가 들어서고 번듯한 정교회교회가 세워졌지만 현대적 도시로 성장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와 중국의 동성철도(東省鐵路) 노선이 두 도시를 비껴 지나갔다. 수에즈 운하가 뚫리면서 육로 교역이 쇠퇴했다.

캬흐타는 20세기초 러시아 혁명후 내전기간에 잿더미가 되었으나 그후 복구되지 못했다. 2010년 인구는 2만명. 브랴티야 공화국에 속해 있다.

 


<참고자료>

Wikipeida, Kyakhta

Wikipeida, Kyakhta trade

Wikipeida, Altanbulag, Selenge

이매뉴얼 C.Y. , -현대 중국사(), 까치

윤성학, 모피로드, 케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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