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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비요프, 네벨스코이에게 아무르 탐험 지시…하구에 정착촌 건설
연해주②…“러시아 국기는 내릴수 없다”
2022. 08. 28 by 김현민 기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인은 아무르강을 이용할 수 없었다. 조약에 의해 두나라의 경계가 아무르강 북쪽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국가간 약속은 150년쯤 지나 흐지부지되었다.

1843~1845년 독일 생물학자 알렉산더 폰 미덴도르프가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얻어 북극해와 오호츠크해를 돌아다니며 동물과 식물의 서식형태에 대해 조사했다. 그는 오호츠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당시 중국 땅이었던 아무르 하류를 탐사하고 돌아갔다. 학술연구를 빙자했지만 허가 없이 남의 나라 땅에 들어간 것은 국제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1847년엔 알렉산드르 가브릴로프가 아무르강 하구에서 바다로 통하는 깊은 곳이 있는지를 조사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몰래 들어갔다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되자, 러시아인들은 간이 더 커졌다. 이젠 본격적으로 아무르강을 탐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니콜리아 무라비요프(Nikolay Muravyov)였다.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위키피디아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위키피디아

 

무라비요프는 1809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나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19살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참전하고 폴란드 폭동 진압에 투입되었다. 24살에 몸이 아파 아버지의 영지에 쉬다가 29살에 다시 군대로 복귀해 코카서스에서 복무를 하다가 흑해에서 근무를 했다. 32살인 1841년에 육군 장군으로 승진했으나 몸이 허용하지 않아 제대했다.

전역 후 정부 일을 했는데, 툴라주 주지사로 있을 때 그는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농노제 폐지를 건의했으나, 차르는 그의 건의를 묵살했다. 귀족사회에서 그는 자유주의자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184795일에 이르쿠츠크-예니세이스크 총독 발령을 받았다. 나이 38살에 불과했다. 이 젊은 자유주의자에게 시베리아 동부의 광대한 영토를 맡긴데 대해 귀족들 사이에 말들이 많았다. 무라비요프가 니콜라이 1세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차르는 젊은 총독에게 중국을 흔들어 최대한의 이득을 챙기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다. 당시 외무장관 카를 네셀로데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무라비요프가 시베리아로 떠나기 전에 러시아는 아무르강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아무르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는 18401차 아편전쟁에서 중국 청나라가 영국에 패한 이후 러시아가 아무르강에서 이득을 취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처사였고, 무라비요프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다.

무라비요프는 시베리아에 부임한 이후 우선 내치에 힘썼다. 시베리아는 수도에서 멀어 지방관의 독자성이 강했고 그에 따른 횡령이 만연했다. 그는 공공자금을 휘어잡고 투명성을 강화했으며, 탈루와 탈세를 뿌리 뽑았다. 또 원주민들에게 학교를 지어 러시아어를 배우도록 했으며, 몽골족과 퉁그스족에게 불교와 샤머니즘에 대한 신앙 생활도 지속하도록 배려했다.

 

게나디 네벨스코이 /위키피디아
게나디 네벨스코이 /위키피디아

 

내정이 안정된 후 무라비요프는 시찰에 나섰다. 1849년 그는 이르쿠츠크에서 오호츠크까지 육로로 간 다음에 캄차카 페트로파블로프스크까지 둘러보았다. 그는 극동함대의 본거지를 오호츠크에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아무르에 대한 탐사는 게나디 네벨스코이(Gennady Nevelskoy)를 원정대 대장에 임명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아무르강이 태평양으로 향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구에 물이 얕고 모래밭이 형성되어 배가 지나갈수 없다고 보았다. 앞서 여러 탐험가들이 배가 다닐수 있는 깊은 수로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네벨스코이의 목표는 그 수로를 찾는 것이었다. 아무르강에 배가 다닐수 있다면 예니세이강에서 바이칼호로 와서 짧은 거리의 육로를 건너면 아무르 강을 타고 태평양으로 나갈수 있게 된다. 이 강의 수로가 똟릴 경우 험하디 험한 콜리마산을 넘어 오호츠크로 나갈 필요가 없어진다.

1849년 네벨스코이는 아무르 탐사길에 나섰다. 그의 탐사는 국제법을 위반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중국 영토를 무단으로 횡단하며 하류로 나아갔다. 그는 마침내 아무르강 하구에서 배가 다닐만한 깊은 수로를 찾아내는데 성공했고, 곧이어 타타르 해협을 발견하고 사할린이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러시아인들은 타타르해협을 네벨스코이 해협이라고 명명했다.

사할린이 섬이란 사실은 중국이 오래 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네벨스코이에 앞서 50년전에 일본인 마미야 린조가 확인한 사실이었다. 당시 국가간에 지리정보는 비밀이었다. 러시아도 사할린이 섬이란 사실을 국가기밀로 감추었다.

앞서 영국이 사할린을 탐사했지만 섬이란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고 반도로 알고 있었다. 이 잘못된 지리정보는 크림전쟁(1853~56) 때에 영국의 오판으로 드러났다. 1854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타타르 해협에서 러시아 함정을 발견해 추적했다. 영불 함대는 사할린이 반도이고, 그 안의 바다는 만(bay)이므로 러시아 함정이 독안의 쥐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러시아 배는 유유히 타타르 해협을 지나 북쪽으로 탈출했던 것이다.

 

무라비요프의 원정대가 아무르강의 도시 아이훈을 지나고 있다. /위키피디아
무라비요프의 원정대가 아무르강의 도시 아이훈을 지나고 있다. /위키피디아

 

어쨌든 네벨스코이가 아무르강 수로와 사할린이 섬이란 사실을 확인함에 따라 무라비요프는 강 하구에 정착촌 건설을 서둘렀다. 그는 아무르 정착톤을 캄차카의 페트로프블로프스크를 대체하고 태평양 연안의 중심도시로 육성할 작정이었다. 도시 이름은 차르 이름을 따 아무르의 니콜라예프스크”(Nikolayevsk-on-Amur)로 했다. 중국 영토에 건설한 불법 정착촌이었다. 이 러시아 정착촌은 중국 명나라 시대에 환관 이시하(亦失哈)가 다녀간 곳이다. 그곳에 러시아가 버젓이 요새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외무장관 네셀로데가 알고는 그 곳이 중국 땅이며, 중국과의 조약을 위배하는 일이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 때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일단 러시아 깃발이 올라간 곳에 다시 내릴수는 없다.”(where once the Russian flag is raised, it must not be lowered)

무라비요프가, 네벨스코이가 불법을 저지르든 말든, 그들이 일단 러시아 삼색국기를 꽂으면 그곳은 러시아 영토라는 것이다. 황제의 말에 외무장관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무라비요프의 불법 행동은 당연시되었다.

무라비요프는 아무르 하구에 니콜라예프스크를 비롯해 몇 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1850년 이후 3년간 바이칼호 주변에 정착한 코사크와 농노 2만여명이 아무르강을 따라 내려가 태평양 바닷가에 정착했다. 1854년엔 1,000명의 이주자들이 강을 따라 이동했다. 바지선과 뗏목이 모두 77척이나 되어 장관을 이루었다. 아이훈에 주재하던 청나라 만주족 지방관은 러시아 행렬을 제지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에 휘말렸고, 만주족 군대 대부분이 내란진압에 동원되어 국경에는 극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만주족 관리는 러시아 선단에 빨리 지나가달라고만 했다. 청 조정은 뒤늦게 러시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불법이라고 항의했지만, 아무런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만주족이 밀리기 시작하자 차르는 아무르 유역의 땅을 갖고 싶어했다.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차르는 무라비요프에게 네르친스크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영토협상을 벌일 것을 하명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Nikolay Muravyov-Amursky

Wikipedia, Amur Annexation

Wikipedia, Gennady Nevelsk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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