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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야기
고대부터 침공로, 무역로…먀오다오 열도, 찬산 열도가 징검다리 역할
노철산수도, 랴오둥과 산둥반도 잇는 오랜 뱃길
2022. 09. 02 by 박차영 기자

 

우리나라와 중국을 연결하는 가장 오래된 뱃길이 노철산수도(老鐵山水道). 노철산수도는 산둥(山東)반도에서 랴오둥(遼東)반도 사이의 뱃길을 말한다.

노철산(老鐵山)은 랴오둥(遼東)반도 뤼순(旅順)에 있는 산으로, 중국 발음으로 라오톄산이다. 산 위에 등대가 있는데 청나라 때 건설되어 1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해와 보하이해(渤海)를 운항하는 선박들에게 위치를 확인해준다. 이 산은 철새의 휴식처로 유명하다.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오가는 철새가 긴 여행길에 쉬어가는 곳이다. 철새만큼이나 인간과 화물을 태운 배도 수천년동안 노철산을 통과해 왔다.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뱃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철산수도와 서해횡단항로다. 횡단항로는 산둥반도에서 서해를 가로질러 황해도 예성강, 당은포(경기 화성)로 가는 길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할 때 이용했던 뱃길이다. 하지만 횡단항로는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폭풍이 불 경우 피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따라서 노철산수도가 고대부터 열렸고, 가장 최근에도 서해 횡단항로보다 안전한 항로로 활용되어 왔다.

이 뱃길은 당나라 가탐(賈耽, 730~805)의 기록에도 나온다. 가탐의 도리기’(道里記)에는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해로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지금의 봉래인 등주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먀오다오열도를 거쳐 랴오둥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뤼순에 이른다. 이어 랴오둥반도에서 창산열도를 거쳐 압록강 하구에 이르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 장구진(황해 풍천), 곡도(백령도), 고사도(강화도),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신라의 대외 항구였던 당은포(경기도 화성)에 이르렀다.

이 해로는 신라가 진흥왕 13(552)에 한강 유역을 점유한 뒤로 때로는 고구려·백제의 방해로 막히고 위협을 받기도 했으나 멸망할 때까지 꾸준히 활용되었다. 서해 횡단 수로에 비해 거리가 멀고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하기 때문에 이른바 사절단의 조공로(遣使獻貢)로 이용되었다.

 

묘도열도를 이용한 노철산수도 /박차영
묘도열도를 이용한 노철산수도 /박차영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 사이에 먀오다오(廟島)열도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메이산(眉山)열도라고도 하는데, 두 반도 사이에 북동~남서로 배열되어 있다. 32개의 섬과 80여 개의 산호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해에는 어족이 풍부하며, 주민은 반농반어의 생업을 한다.

랴오둥반도의 창산(長山)열도도 해로로 활용된다. 이 열도는 랴오둥반도 동쪽, 서해상에 2열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큰 섬은 광루섬[廣鹿島]이며, 리창산(裏長山)열도와 와이창산(外長山)열도로 나뉜다. 122개 섬과 260개 초로 구성되어 있다. 러일전쟁 이후에 일본군이 점령했다가 1945년에 중국에서 환수했다.

 

조선시대에는 조공로는 주로 육로를 이용했지만 만주가 봉쇄됐을 때 노철산수도를 이용했다.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3년 인조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단은 이 뱃길을 따라갔다. 당시 서장관으로 사절단에 동행한 이민성(李民宬)이 베이징을 오가며 겪은 내용을 조천록’(朝天錄)에 기록했다.

이민성의 조천록에 따르면, 사신단은 한양을 출발해 압록강 어귀 우도에 도착했다. 일행은 배를 타고 창산(長山)열도의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들러 랴오둥반도로 향했다. 사신단은 랴오둥반도에 내리지는 않았다. 그곳이 이미 여진족에 의해 점령되었고, 바다의 섬들만 명나라의 지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랴우둥반도의 끝(노철산)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묘도 열도를 따라 항해하다가 마침내 613일 산둥반도의 항구도시 등주에 도착했다. 중간에 섬들에 들러 쉬기도 했지만, 바닷길 여행이 21일이나 걸렸다.

 

옛 사람들은 지금의 내비게이션과 같은 항로식별장치를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과 육지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항로를 식별했다. 따라서 랴오둥반도의 창산열도, 랴오둥과 산둥반도 사이의 먀오다오열도는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해로식별에 큰 도움을 주었고, 잠시 들러 쉬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 우리역사넷 북방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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