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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야기
왜적 침략에 대비, 갑문도 구축…만주족 침공 시에는 무방비
첨단설비 갖춘 명나라 해군기지 펑라이수성
2022. 09. 03 by 박차영 기자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烟台)시에 펑라이(蓬莱)수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수성(水城)은 육지에 있는 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 위에 세워진 성이다.

전통적으로 내륙국가인 중국이 바다를 막아 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펑라이수성의 다른 이름이 비왜성(備倭城)인 것은 그런 배경에 연유한다.

 

펑라이 수성의 위치 /위키피디아
펑라이 수성의 위치 /위키피디아

 

펑라이의 옛지명은 덩저우(登州),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서해와 발해(渤海, 보하이)를 가르는 곳에 위치하며,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를 잇는 먀오다오(廟島)열도가 출발하는 곳으로 한반도와 만주, 일본으로 가는 항로의 기점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소년 500, 소녀 500명을 동방으로 보낸 곳이 덩저우였다. 도교에서 붉은 절벽(丹厓)에 여덟 신선(八仙)이 사는 봉래산(蓬萊山)이 이곳에 있다고 했다.

이곳에 수군기지가 들어선 것은 북송 시기부터였다. 북송 경력(慶曆) 2(1042)에 수군요새를 쌓았는데 도어채(刀鱼寨)라고 했다.

펑라이 수성은 명 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홍무 9(1376)에 토성으로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만력 24(1596)에 토성에서 벽돌을 개축, 성벽이 강화되었다. 왜군이 조선을 거쳐 중국을 침공할 것에 대비한 것이다. 성의 면적은 27, 시설은 항구 건물과 방어 건물로 나누어진다. 시설물로는 수문, 방파제, 부두, 등대, 성벽, 포대, 갑문, 해자 등이 있고, 이런 시설물들은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펑라이 수성 전경 /바이두백과
펑라이 수성 전경 /바이두백과

 

펑라이 수성은 전함을 계류시키는 일종의 항구다. 펑라이는 우리 서해의 인천과 마찬가지로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데, 조수간만에 구애받지 않고 배가 정박하도록 도크시설을 만들었다.

큰 파도를 막는 방파제와 함께 항구 안팎의 수위를 조절하였던 갑문(閘門)이 설치되었다. 당시 수성에는 인천항 갑문처럼 밀물 때 열고, 썰물 때 닫는 갑문을 설치했다. 최신식 항구시설이었다.

펑라이는 산둥반도 최북단에 자리한 항구도시로,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 곳의 봉래각(蓬萊閣)은 북쪽 해안가의 가파른 절벽으로 된 단애산(丹崖山) 정상에 있는 누각으로,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후난성 웨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장쑤성 난창(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중국 4대 누각으로 꼽힌다. 당나라 때부터 용왕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북송 인종 때인 1061년에 등주 군수 주처약(朱處約)이 용왕묘를 옮기고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펑라이 수성에는 북문(北門)은 선박이 출입하던 수문(水門)이었고, 남문은 사람과 마차가 출입하는 육문(陸門)이었다. 적대(敵臺)와 포대(砲臺)는 적들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벽이었고, 수성을 보호하기 위 한 중요한 시설이었다. 명나라 때 왜적을 물리친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이곳에서 수군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펑라이 수성 /바이두백과
펑라이 수성 /바이두백과

 

1623년 사신으로 펑라이 수성을 방문한 서장관 이민성(李民宬)은 자신의 여행기에 이렇게 표현했다. “절벽에서 바다 골짜기를 굽어보니 눈이 아찔하고 무서웠다. 담 문으로 돌아 나와 수성(水城) 문에 있는 작은 누각에 올라가 어부들이 그믈질하는 것을 보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다.”

 

펑라이 수성 /위키피디아
펑라이 수성 /위키피디아

 

왜적에 방비하기 위해 만든 성은 만주족에 쉽게 무너졌다. 명청 교체기에 덩저우를 지키던 명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1631년 반란을 일으켰다. 명 조정은 진압군을 파견했고, 공유덕은 반군을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했다. 그는 포르투갈에서 전수받은 홍이포(紅夷砲) 제조기술을 청에 가져감으로써 무기기술력에서도 청이 명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도록 역적질을 했다.

덩저우는 청말인 1858년에 외국에 개방되었는데,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항구는 무역항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펑라이에서 48km 떨어진 지푸(芝罘)항이 새로 군설되었고, 옛 펑라이수성은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1982년 중국정부는 이 성을 주요문화재시설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펑라이 수성 /위키피디아
펑라이 수성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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