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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몽골 연결하는 동서문화의 중간지점…“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명도
이르쿠츠크, 유배지에서 동시베리아 중심지로
2022. 09. 15 by 김현민 기자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 ‘동양의 페테르스부르크’, ‘시베리아의 아테네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인구는 60만 남짓, 360여년간 동시베리아의 중심도시였다.

지리적으로 예니세이강 지류인 앙가라강을 끼고 있으며, 강으로 바이칼호와 연결된다. 바이칼호를 건너 셀렝게강을 이용해 몽골의 울란바토르와 연결된다. 예니세이강의 중심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남동쪽으로 520km, 떨어져 있고, 울란바토르에서 북쪽으로 320km 거리에 있다. 근처에 있는 국경도시 캬흐타를 통해 중국, 몽골을 연결하는 무역중심지였다. 20세기초에 시베리아철도가 연결되면서 하천운송의 중심에서 육상운송의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예니세이강과 이르쿠츠크 /위키피디아
예니세이강과 이르쿠츠크 /위키피디아

 

이르쿠츠크(Irkutsk)의 도시이름은 굽이치는(spinning) 이라는 의미의 몽골어 이르쿠트강(Irkut River)에서 나왔다. 이르쿠트강과 앙가라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다.

1652년 코사크 대장 이반 포하보프가 원정 도중에 겨울 숙영지로 삼았던 곳인데, 1661년에 야코프 포하보프가 부랴트족에게 야삭(세금)을 받기 위해 목책성(오스트로그)을 조성하면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르쿠츠크는 원주민인 몽골족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에 요새를 지은 것은 감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감옥은 1661년 요새 건설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차르 정부는 준군사조직인 코사크 무리들을 통제하기 위해 동시베리아 길목에 감옥을 세운 것이다. 이에 더해 야삭을 걷는 세리, 통신병, 행정요원으로 도시의 모습을 갖췄고, 1686년 차르에게서 시로 승격하는 칙허를 받았다.

 

항공촬영한 이르쿠츠크 /위키피디아
항공촬영한 이르쿠츠크 /위키피디아

 

1825년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젊은 장교들이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니콜라이 1세 즉위에 맞춰 반란을 일으켰다. 12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 반란을 데카브리스트 반란(Dekabrist revolt)라 부른다. 차르 정부는 반란주모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그중 120명을 이르쿠츠크로 추방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길을 발목에 쇠사슬이 감긴 채 1년을 걸어서 갔다. 가는 길에 대부분이 죽고 일부만 살아서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강제 노동을 하다가 일부는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했으며, 1856년 황제의 특사로 해방되었을 때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45명은 귀환했지만,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에 금지되었다.

데카브리스트 주모자들의 추방은 최초의 시베리아 유형이었다. 이후 제정러시아는 중범죄자를 이르쿠츠크로 보내 강제노역을 시켰다. 19세기말, 이르쿠츠크 인구의 3분의1이 죄수였다고 한다.

이르쿠츠크에 온 죄수들은 러시아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서유럽 물을 먹은 귀족은 물론 폴란드 반란세력,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죄수들은 이 시베리아 도시에서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예술가와 건축가들은 서유럽 풍의 건축물을 지었고, 그 건물들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다.

18797월 대형화재가 발생해 총독관저와 주요관청, 도서관, 박물관 등이 불타고 4,000가구가 소실되었다. 도시의 4분의3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도시는 빠르게 재건되었고, 1898년에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하는 역사가 준공되어 모스크바를 열결했다. 20세기초 이르쿠츠크는 화재의 악몽을 잊고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게 되었다.

 

이르쿠츠크 역사 /위키피디아
이르쿠츠크 역사 /위키피디아

 

1803년부터는 시베리아 총독부, 1822년부터는 동시베리아 총독부가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백군의 거점이 되었으며, 1920년 백군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산업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고, 앙가라 강에 대규모 저수지가 건설되었다.

동서 문명의 중간지점이어서 유대교 시나고그와 이슬람 모스크도 있다. 시내에는 폴란드 유배자들이 지은 고딕 양식의 가톨릭 교회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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