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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사할린 공격…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소련영토로 인정
사할린②…소련의 침공
2022. 09. 21 by 김현민 기자

 

일본은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을 40년간 지배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러시아에게서 사할린의 절반을 양도받은 이후 194582차 대전 막바지에 소련군의 침공으로 뺏기기 직전까지다.

일본은 남사할린에 가라후토청(樺太庁)을 설치해 식민지를 관리하는 척무성(拓務省) 산하에 두었다. 1920년엔 조선과 대만과 같이 외지(外地)로 분류했다가 1943년에 본토 개념의 내지(內地)로 격상, 내무성 소관으로 이전했다. 남사힐린의 행정중심지는 초기에 오토마리(大泊, 지금의 코르사코프)에 두었다가 1908년에 토요하라(豊原. 지금의 유즈노사할린스크)로 옮겼다. 일본이 1945년 남사할린을 러시아에 내줄 무렵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합쳐 4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의 남사할린 행정을 담당한 가리후토청 /위키피디아
1945년 일본의 남사할린 행정을 담당한 가리후토청 /위키피디아

 

일본이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남사할린을 내지로 전환한 것은 그곳을 본토 개념으로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 땅을 러시아가 뺏았다. 그 배경에 구소련의 침공이 있었다.

테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미국의 오키나와 공격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소련의 사할린 공격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 50여만명의 병력을 투입해 2만여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5만여명이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에 비해 소련은 10만명을 투입해 500여명이 죽고 800여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지만 소련은 사할린 그다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일본이 항복을 고려할 때에 소련이 뒤늦게 참전한 게 그 이유였다.

 

1945년 8월 소련의 남사할린 공격도 /위키피디아
1945년 8월 소련의 남사할린 공격도 /위키피디아

 

러시아와 일본은 19414월에 상호불가침조약(중립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가 먼저 이 조약을 파기했다. 19452월 얄타 정상회담에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의 윈스턴 처칠에게 대일전쟁에 소련이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조건은 독일이 패망한후 2~3개월 되는 시점이었다. 독일은 그해 59일 연합군에 항복했다. 소련은 약속에 따라 독일이 패망한지 3개월이 되는 89일에 일본의 괴뢰정권이었던 만주국을 공격했다.

그날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이 급속히 붕괴되는 시점에 소련군이 아시아전선에 투입된 것이다.

소련군의 사할린 공격은 811일 시작되었다. 사할린의 경계선인 북위 50°에서 소련 16군 소속 보병 2만명이 100대의 탱크를 앞세워 남하했다. 일본군의 방어병력은 소련군의 3분의1에 불과했지만, 완강하게 저항했다. 공격개시 사흘이 지나도록 소련군은 한발도 나가지 못했다. 일본군은 가라후토를 내지로 보았기 때문에 결사항전을 벌였다.

815일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고 군부가 전투행위를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일본 제5방면군은 사할린을 지키는 88사단에 최후의 1명까지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북위 55°를 지키던 부대 3,000명은 569명의 희생자를 내고 백기를 들었다.

그후에도 사할린의 일본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소련은 육군만으로 승리하기 어렵다고 보고 연해주에 주둔하던 해병대를 투입했다. 816일 태평양 주둔 소련 해군이 1,400명의 해병을 싣고 남사할린 서부의 토로에 상륙했다. 일본 수비병 200명의 옥쇄를 뚫고 소련 해병은 다음날 토로를 점령했다.

바다와 육지에서 소련군이 포위공격하면서 일본군은 서서히 밀려났다. 일본군은 시민 소개령을 내리고, 일본 국적자를 배에 싣고 본토로 이동시켰다. 일본인 상당수가 당시 국민복을 입고 있었는데, 소련군은 국민복을 군복으로 오인해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맣은 비전투 시민이 사망하기도 했다. 그 수효가 600~1,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820일 마오카항(지금의 홀름스크)에 대한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화교환수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직장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소련군이 일본여자를 잡아 집단윤간하고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오카가 함락 직전에 몰렸다. 12명의 여성 교환수 가운데 9명이 음독자살을 선택했다. 다행히 한 남자 동료가 3명의 여성 교환수를 설득해 죽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막았다. 살아남은 3명은 소련 치하에서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825일 일본군은 최후의 저항을 끝내고 남사할린의 치소(治所) 토요하라를 내주었다. 항복 이전에 40만명의 일본인 가운데 10만명이 일본으로 소개되었다. 30만명은 사랄린에 남았다. 조선인도 대부분 남았다.

일본은 사할린 전투를 가리후토 전투라고 명명한다. 일본군은 700~2,000명이 전사했고, 나머지 18,202명은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 포로들은 소련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나중에 귀국했다.

 

1945년 이전에 사할린 국경을 지키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1945년 이전에 사할린 국경을 지키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소련군은 사할린 공격에 이어 쿠릴열도도 공격했다. 이때 미국은 훌라 작전을 발동해 소련군의 공격을 지원했다.

미국은 그렇게 피를 흘려 점령한 오키나와를 1972년 일본에 돌려주었다. 하지만 소련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영토로 인정받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Soviet invasion of South Sakhalin

Wikipedia, Karafuto Prefecture

Wikipedia, Soviet assault on Ma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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